책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 (1)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2년간 옆에서 지켜보며, 우리가 그동안 죽음에 대한 논의를 얼마나 터부시 했는지 알았다. 어떻게 살지는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마주할 것인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이야기 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런 이야기는 불길하고 무섭다는 이유로.
죽음을 정말 편하게 논의할 수 있는 시기는, 사실 가장 죽음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 때가 아닐까? 막상 가족 혹은 나의 죽음이 닥쳐 왔을 때는 말이 씨앗이 될까,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지막까지 할머니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정말 마지막이 될까 싶어 무서웠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끝, 자연의 마지막 질서이자 종결로 보는 태도다. 이를 중립적 수용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로, 행복한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접근한다. 마지막은 죽음에 관한 가장 안 좋은 자세로,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탈출로 받아들이는 탈출적수용의 자세다. 어떤 태도를 가질 지는 온전히 본인의 선택이지만, 태도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몸과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을 맞이 할 것이다.
할머니는 마지막 1년을 '독하지 못해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 표현하셨다. 평생을 몸을 움직이며 생명을 채워왔던 할머니는 노화로 몸이 닳아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셨다. 매일 '꿈지럭 거리지 못해 미칠 것 같다.'며 하릴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계셨다. 할머니의 마지막 여생이 진정으로 어떻게 기억될지 사실 당사자가 아닌 나는 알 수 없다. 자식과 며느리, 손녀딸과 함께하며 잠자듯 영면하신 할머니의 마지막이 사실은 할머니가 원하는 모습이었을지, 아니면 말씀처럼 진정 괴로우셨던 거였을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죽음을 인정하고 평안한 여생을 준비하는 웰다잉(Well-Dying)은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당장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웰다잉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노년의 시간뿐만 아니라, 연명의료,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장례 등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은 사실 굉장히 포괄적이다.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논의가 적극적으로 되길 바란다. 흔히 아는 생의 마지막 모습인 병원, 요양원, 치료, 연명의료, 유교식 장례 외의 모습들외의 상상들이 자유롭게 펼쳐졌으면 좋겠다.
특히 장례식만큼은 고인이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의미이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따라가기만 하는 장례식이 아닌, 상주의 사회적 지위와 속한 조직을 확인할 수 있는 장례식이 아닌 고인을 진심으로 추모하고 기억하는 장례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상상한다. 상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었다.
내가 이룬 가족 형태는 어떨까? 할머니처럼 노년에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손주가 있을까?
만약 내가 질병이나 사고가 아닌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나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을까?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누구와 함께 있을까?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가진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줬을 때 행복하게 떠날 수 있을까?
나는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할까?내가 죽은 뒤 장례식장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지금은 할 수 있으나 살아가며 가치관이 변하고 시각이 변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 의지로 정할 수는 없다.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나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며,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생의 마지막에 다양성이 존중되는 관용적인 사회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남아있을 사람도 떠날 사람들도 이별의 시간이 덜 아플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라.
- 그리스 철학가 에피쿠로스
무가 되는 죽음은 삶의 한계이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 하이데거
참고문헌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유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