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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재 Jun 26. 2020

남성중심의 장례식에서 조금 '덜' 참아보기로 했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나는 철저하게 2등 시민이었다.


지이이잉-

이른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에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엄마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불안이 엄습했다. 이전에도 가족들한테 전화가 올 때 이런 불안감을 자주 느꼈다. 밝고 가벼운 목소리에 안심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그날은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할머니의 비보를 듣는 건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마음의 준비는 계속 하고 있었다. 지난 1년간 눈에 띄게 야위고 힘이 사라지는 할머니를 보면서 죽음을 계속 상상했다. 그 상상의 끝은 늘 ‘언젠가 다가올 순간이지만 지금은 아니어서 다행이다.’였다.

그 순간이 다가오자 알았다. 죽음은 연습할 수 없다. 다른 가족의 죽음도 마찬가지였고, 당장 마주한 할머니의 죽음도 모두 각자의 모습으로, 다른 형태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장례식은 연습이 되었다. 슬픔과 별개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할머니의 빈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어떤 모습을 보게 될 지는 명확히 알았다.


가족들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긴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장례식장을 정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장례식 수속을 밟고 가족들 이름을 올렸다. 20년 전 찍어놓았던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몇 달 전부터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예전에 찍은 사진을 합성해야 했다. 엄마는 다시 집으로 가서 앨범을 뒤졌다. 눈을 뒤집어 까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일곱 살의 나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었다. 아빠는 부고 보낼 리스트를 종이에 한 가득 적었고 나는 그 리스트를 받아 문자를 보냈다. 조화가 하나둘 도착하여 장례식장을 채웠고, 가까운 친인척들이 오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유족들의 이름이 장례식 로비에 있는 스크린과 분향실 입구에 붙었다.



고인 ㅇㅇㅇ

자 ㅇㅇㅇ , 자부 ㅇㅇㅇㅇ

녀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사위 ㅇㅇㅇ, ㅇㅇㅇ

손자 ㅇㅇㅇ 손녀 ㅇㅇㅇ, ㅇㅇㅇ

외손자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외손녀 ㅇㅇㅇ, ㅇㅇㅇ


10년 전에 할아버지 장례식 때는 나와 언니, 외손자, 외손녀들 이름은 쓰지도 않았고, 내 남동생 이름만 적었다. 10년이 지나고 겨우 이름 석자는 적혔지만 여전히 아들이 먼저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촌 오빠보다도 스무 살이 더 어린 내 동생의 이름이 가장 먼저 쓰여 있었다. 그 이름표를 한참 보면서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나는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이 장례식장에서는 ‘덜’ 참기로 했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분향소 앞에 있던 종이를 빼어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름이 잘못되어서 바꿔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니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나는 이름을 찍 긋고 ‘손주’ 라고 쓴 뒤 나이순으로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관리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보통 친손자 적고, 그다음 외손자를 먼저 적는데, 이렇게 안 써요.”

“네, 근데 저희는 이렇게 쓸 거예요.”

“원래 이렇게는 안 쓰는데…”

“저희는 이렇게 써요. 이렇게 바꿔 주세요.”

나이가 지긋한 관리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름을 바꿔주었다.  


입관식을 마친 후 남자들에게는 비닐에 포장된 완장이, 여자들에게는 종이컵에 쌓여 있는 하얀색 리본이 하나씩 주어졌다. 나는 다시 사무실로 찾아 갔다.

“상주 완장 네 개랑, 상제 완장 세 개 더 주세요.”

“아들들이 더 있어요?… 아닌데?”

“딸들이 할 거니까 주세요.”

“딸들은 이거 차는 거 아닌데?”

“그냥 주세요. 완장.”

내가 관리인과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보자, 음식 담당 실장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들고 갔다. 장례식이 낯설고 이 문화를 잘 모르는 아이에게 가르치는 투였다.

“원래 남자들만 완장 하는 거예요. 여자들은 리본 차는 거고.”

“상주 네 개, 상제 세 개 더 주세요.”


관리인은 계속해서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며 결국 일곱 개의 완장을 더 꺼내줬다.

나는 네 개의 완장을 고모들과 엄마에게 가져다주었지만, 아무도 차지 않았고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완장들은 그대로 환불되었다. 언니와 나만 완장을 오른쪽 팔에 찼고 분향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인사를 드렸다.

나와 언니만 분향실에 있으면 어른들은 남자 사촌들에게 말했다.


“상주가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해. 안에 들어가 있어야지.”

그리고 분향실에 앉아 있는 나와 언니를 못마땅하게 보며 수군거렸다.


“여자가 저기 앉아 있으면 안 되는데…”

“너 동생이 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이따가 손님 많아지고 바쁘면 여자들은 같이 음식 나르고 치워.”


가끔 무례한 손님들도 찾아왔다.

“큰아들은 어딨어?”

“여자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향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며 추억을 쌓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기억했던 손주였던 내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아무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불편한 눈초리를 나에게 보내던 어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할머니 곁을 지켰던 유일한 손주는 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정도 역할을 했기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촌 오빠들이 당연하게 할머니의 자식으로 조문객을 맞았다. 남자사촌들은 앉아 있다가 힘들거나 쉬고 싶으면 자기들끼리 교대했다. 분향실을 비워두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분향실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며 오는 사람에게 맞절을 하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 지겨운 일이었다.


한 남자 사촌은 분향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말했다.

 "하고 싶으면 해. 이게 뭐라고."  

그러게. 이게 뭐라고 나는 여기 앉아있는게 이렇게 힘든걸까? 그렇지만 나는 유난 떨고 시끄럽게 구는 애가 되서야 비로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한 번에 바꾸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겨. 천천히 바꿔야지.”


상주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아빠가 말했다. 그 부작용이 뭐냐고 물었지만 명쾌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난 장례의식을 바꾸지도 않았고, 제사상에 치킨이나 피자를 올린 것도 아니다. 나는 손주들의 이름을 태어난 순으로 바꾸고 상주 자리에 앉아서 손님이 오시면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작용은 그들의 눈에 내가 거슬리는 것뿐이었다.


성복제를 지내기 위해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장례지도사는 곡을 한 뒤 가장 먼저 장남을 불렀다. 장남인 아빠는 술을 따르고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은 장손 차례였다. 모두가 내 남동생을 불렀고, 남동생은 홀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들을 불렀다. 장례지도사는 나와 언니를 보고 말했다.


“결혼한 손녀분은 이따가 절 하세요.”

언니가 출가외인이기 때문이었다.


절의 순서는 고인의 아들, 아들의 아들, 며느리, 아들의 결혼하지 않은 딸의 순으로 진행되었고, 그 다음이 고인의 사위, 딸, 외손주, 손주사위와 손녀딸 순이었다.

언니는 그 장례지도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와 엄마와 함께 절을 했다.


다음 날 발인제를 지낼 때 장례지도사는 말했다.

“어제 제사 지내는 순서로 말들이 많으셨는데요. 옛날에는 여자들은 제사 지내지도 못했습니다.”


고인이 된 할머니를 모시는 의식을 해놓고 옛날 여자들 운운하는 말을 하다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있는데 고모가 나섰다.

“그건 옛날이고…”

“조용히 해!”

장례지도사에게 항의를 하는 고모를 저지하는 것은 고모부였다. 그렇게 그 무례한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장례식은 마무리되었다.






한 줌의 재가 된 할머니는 남동생의 품에 안겨 할아버지가 계시는 호국원으로 오셨다. 할아버지가 계신 유골함 앞의 명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손주 중에는 동생의 이름만 있었다. 10년 동안 이름을 적지 않은 것에 대해 아빠에게 누누이 말해온 터라 명패를 수정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처럼 손주들 이름을 나이순으로 적자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나이가 더 많은 외손주들의 이름을 먼저 적는 것이 내키지 않는지 바로 쓰지 못했다. 그런 아빠를 보며 호국원 직원은 말했다.


“원래 친손자부터 적어요. 친손자부터 적으세요.”

“알아서 할게요. 그냥 불러주는 대로 적어.”

장례식 내내 아무 말 하지 않던 엄마까지 가세했다. 엄마는 외손주와 친손주를 포함해서 태어난 나이순으로 이름을 적었고 항상 맨 앞에 있던 내 동생의 이름은 맨 뒤에 갔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말했다.


“손자 이름 맨 뒤에 있는 거 보면, 우리 엄마 벌떡 일어나시겠네.”


돌아가신 부모의 명패에 자식과 남편의 이름이 적히지 않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던 고모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며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엄마는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습관이 된 침묵, 침묵이 만들어낸 평화에 익숙해져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빠 말대로 친손자 이름이 가장 뒤에 있어서 속상하실까? 아니면 손녀딸이 할머니 가시는 길에 술 한 잔도 제대로 못 올리고 인사도 못 드린 것이 더 속상하실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옛날 분이셨으니까.


여전히 장례 문화는 남성 친족 중심이며, 너무나 보수적이고 변화가 더디다. 그 더딘 변화는 유족들의 인식의 부재도 있지만 그 산업에 종사하는 장례식장의 관리자들, 장례지도사, 호국원 직원들이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에 성차별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불시에 일어나고 식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갑작스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유가족들은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 상황에서 “원래 그래.”라는 말은 마법처럼 여성들을 조용히 지운다.


전통적인 장례식의 대안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부작용’이라는 말로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하나씩 바꾸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변화의 시작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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