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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재 Oct 14. 2020

너 누구여, 얼굴이 익는데 누군지 모르겠어.


"할머니, 나 나갔다 올게."

외출 전 할머니에게 말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위아래로 나를 쓱 훑어보신다. 할머니가 익숙하게 느끼는 나의 모습은 사실 외출할 때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렌즈 기준으로 마이너스 7을 육박하는 시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눈이 거의 절반이 되는 안경을 쓰고 있다. 목에 살짝 닿는 중단발의 내 머리카락이 목에 조금이라도 닿을까 정수리를 향해 질끈 묶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던 짙은 곤색의 체육복 반바지와, 세월의 흔적때문인지 부들부들하다 못해 흐늘흐늘해져 목이 축 늘어진 반팔티를 입고 있다. 할머니가 익숙하게 느끼는 내 모습이다.


그렇게 종일 할머니와 있다가 주말에 약속이 있을 때는 안경도 벗고, 화장도 하고 멀끔한 옷을 입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거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무말씀도 하지 않고 유심히 나를 쳐다보다가 한 마디 하신다.


"..누구여, 둘째 손녀딸이여?"


긴가민가 한 표정으로 내가 맞는지 확인하는 할머니를 보며 당황한다. 할머니에게 더 열심히 두 가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고 다짐한다.


"할머니, 그럼 나지 내가 누구야."

"나가는겨? 들어오는겨?"

깔끔한 외출복을 한 번 쓱 보더니 나갔다 오는건지, 다시 들어오는건지 물으신다.


"나가는거. 나갔다 올게"

"그려, 잘 갔다 와."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훠이 젓는 할머니. 할머니의 잘 갔다오라는 말에는 옅은 떨림이 있었다. 할머니는 외출하는 나를 보면 늘 같은 목소리와 톤으로 잘갔다오라 말씀하셨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억지로 떨쳐낸 채 외출을 하곤 했다.


그렇게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와 할머니에게 인사한다.


"할머니 나왔어~"

그러면 할머니는 미처 옷을 갈아입지 않은 나를 쓱 보더니 물으신다.


"나가는겨? 들어오는겨?"

"아니 참, 당연히 들어오는 거지! 아까전에 나갔다 온다고 했잖아."

"그려? 언제그렸어?"

내가 나갔다 들어오는건지, 집에 있다가 나가는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는 민망한 듯 멋쩍게 웃으신다. 사실 거의 내가 집에서 할머니를 전담으로 돌보다보니, 할머니는 가끔 나갔다 들어오는 것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다.


취업 준비를 하며 그렇게 할머니와 종일 지내다, 도저히 안되겠다며 강남에 토익 스피킹 학원을 2주간 다녔다. 또 마침 방학이라 집에 온 대학생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날처럼 학원이 끝나고 집에 왔는데, 현관 문 바로 앞에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 나 왔어."

"애미 왔어?"


잘못들었나싶어 할머니에게 다시 묻는다.


"할머니 누구라고?"

"애미 왔냐고!"

"나 애미 아닌데.."

"애미가 아니여? 그럼 누구여?"


할머니의 애미가 아니라는 나의 말에 누군지 확인하려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 밀으셨다.


"할머니 그러게 나 누구야?"

"하이고, 누군지 금방 못알아 보겠네. 얼굴이 익는데 누군지 모르겠어. 너 누구여?"


조금 뜸을 들여볼까하면 할머니가 맞추시지 않을까 잠시 기다렸다. 할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얼굴은 익는데 누구여.. 내가 아는이야? 에휴, 늙으면 죽어야지. 이래서 걱정이야."


결국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죽음을 기원하는 할머니를 멈추기 위해 정답을 말하기로 한다.


"할머니 손녀딸 이재잖어~"

"아, 이재여? 둘째 손녀딸 이재! 알겄다, 이재. 아휴 손녀딸도 못알아보고 큰일이야."


아, 이렇게 집에 없었던 티가 또 난다. 

할머니 기억 속 얼굴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기억 속에 자리했다가도 치매걸린 할머니는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색한 얼굴, 익숙한 느낌에 할머니는 결국 오래 사시는 당신을 탓하고 또 탓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가 잊어버린 빈 공간에 다시 그 자리에 손녀딸을, 가족들을 채울 수 있도록 조금 더 부지런해 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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