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어쩌다 활동가> 제작 기록
심각한 기계치에 보따리장수처럼 일하는 나같은 제작자도 제작지원 면접심사를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놀이터에서 메인(?)놀이기구보다는 기타 자잘한, 별로 인기없는 서브(?)놀이기구에서 놀던 애도 사실은 잘 안 보였을 뿐, 자기만의 방식으로 놀이터에서 계속 놀고 있었다는 걸 누군가가 발견해준 느낌이다.
계속 하다보면 다음이 온다는 말을 점점 믿게 된다.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당최 언제쯤일지 가늠이 안되더라도 놀이터 바닥에서 혼자 모래성을 쌓다보면 누가 와서 같이 쌓고 싶다고 할 수 있다. 영화스크린에서나 봤던, 나와는 너무 멀어보이지만 엄청 고대했던 기관에서 보는 면접인지라 혹시라도 떨어지면 마음이 너무 쓰려서 투샷 에스프레소가 될지도 모르겠다만 며칠 좀 속상해하고 다시 모래성을 쌓으면 될 일이다.
그간 모래성을 쌓으며 썼던 글들을 모아봤다.
4년전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면서 모국어처럼 하던 독일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한국에선 굳이 안해도 되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발표하는 걸 좋아했던 나인데 독일에선 발표는 고사하고 속사포처럼 지나가버리는 영어를 알아듣기에도 벅찼다. 그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조금만 천천히 말해달라고, 조금만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라면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방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경계하는 마음을 허물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열 살 아이들처럼, 무작정 친구하고 싶다고 같이 점심먹고 싶다고 내가 먼저 이야기했더라면 뭐가 어떻게 달랐을까. 그랬으면 1년을 채우고 귀국했을까.
<어쩌다 활동가>를 찍고 편집하는 동안 내가 언어화하지 못했던 느낌이나 의문들을 이길보라 감독님은 암스테르담에서 제대로 마주하신 것 같다. 자신만의 방법론과 그것에 대한 근거있는 확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부러운 마음도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스스로에게 집요할 정도로 묻고 또 묻고, 무엇보다 솔직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쉽게 가려고 하는 마음들, 무의식적으로 선택해버리는 관성들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솔직해져야한다. 얼마나 재미없고 얼마나 뻔한지 스스로 인정해야하니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유치원 친구들과 세일러문 역할놀이를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편집하다가 너무 힘들면 잠시 뒤를 본다. 식빵이가 저러고 자고 있기 때문이다. 발바닥 땅콩냄새나 미간 냄새를 맡고나면 도로 앉을 힘이 생긴다. 식빵이의 귀여움에 고마움을 느낀다�♀️
자기 영화 편집하면서 졸고 있는 자신을 보며 비참한 심정이었다던 임정환 감독님의 이야기가 종종 떠오른다. 지난해 가을까지는 그래도 매번 재밌게 봤던 거 같은데, 디테일을 편집하는 시기가 되니 매번 재밌지가 않다. 그게 진짜 걱정된다. 다른 사람에게 재밌고 유익한 영화면 좋겠는데, 이제는 그 판단이 잘 안된다. 이미 정확한 눈을 잃은지 오래다. 하도 많이 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음에 프로덕션을 꾸리면 나 말고도 편집감독을 한 명 더 두고 싶다.
영화 프로덕션 과정 중에 제일 재밌는 거 꼽으라고 하면 무조건 음악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저작권프리음원에서 내 영화와 맞는 음악을 찾기란, 땅파서 500원 줍는 일과 비슷하다. 최근에 살짝 느끼한 음악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영화랑 잘 어울려서 아주 기분이 좋다. 현재 영화에 삽입된 음악이 총 5곡인데, 그 중에 4곡은 Kevin Macleod라는 분의 음악이다. 케빈맥레오드 당신 이름 여섯글자 기억할게요.
혼자 모래성 쌓는 것도 크게 나쁘진 않은데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친구들아 같이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