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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하 Mar 29. 2021

뒤늦은 고백

좋아했던 애한테 좋아했다고 말했다. 평생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이고 싶었는데 그냥 친구도 아니고 짝사랑했던 애한테 털어놓다니. 생일축하한다며 카톡하다가 갑자기 말해버렸다. 걔가 뭐라고 답장하든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지각변동도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궁금했다. 걔가 뭐라고 할지.




이튿날 답장이 왔다. 전혀 티가 안 나서 몰랐고 왜 그걸 본인만 알고 있다가 이제 이야기하냐고 했다. 내가 그 애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말해주려다가, 아무리 옛날 일이어도 괜히 구차해보여서 굳이 그러진 않았다. 어릴땐 왜 그랬나 모르겠다. 좋아하는 걸 들키는 게 무서워서 눈도 잘 못 쳐다보고 괜히 더 빳빳하게 굴었다. 걔를 좋아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지만 짝사랑 모드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남몰래 누굴 좋아하는 마음은 내게 늘 기분 좋은 긴장을 주었고, 그 긴장감에 약간 중독됐던 것 같다. 가슴이 두근거릴 때마다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걔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게 다 재미없어질 것 같았다. 걔가 그저 학교에 착실히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 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종종 몇 몇 남자애들에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특히 고난도 수학문제를 뚝딱 푸는 남자애들을 보면 갑자기 걔가 너무 멋져보여서 걔를 며칠간 좋아하기도 했다. 딱 보기에 어려운 수학문제 같으면 혼자 제대로 풀어보지도 않고 이거 좀 알려달라고 한 뒤 남자애를 열심히 관찰했다. 내 수학실력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설렘을 소생시키기엔 좋은 방법이었다. 설레하는 내 모습이 찌질하면서도 좋아서 스스로 계속 설레게 만들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표현방식은 달라졌지만, 아직도 설레는 마음은 나를 막 내동댕이치기도 하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설렘을 자주 그리고 많이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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