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어쩌다 활동가> 내레이션 녹음하던 날
영화 내레이션 녹음 때문에 집근처 녹음실 스튜디오를 알아봤다. 이전까지의 다큐멘터리는 아이폰 녹음 기능으로 완성됐던 지라 녹음실을 통한 작업방식은 아는 바가 없었다. 어제 저녁부터 긴장감이 맴돌았다. 공연 전날에도 안 먹는 꿀물이라도 챙겨 마실까 싶었지만, 경험 상 안하던 짓을 긴장할 때 하면 쥐약이기에 꿀물 같은 건 원래대로 안 마시기로 했다.
신으면 괜히 으쓱해지는 가죽롱부츠를 신고 집을 나섰다. 롱부츠의 도움을 받으면 왠지 녹음이 더 잘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문을 열자 엔지니어 선생님이 앞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오늘의 부적 신발인데 이걸 벗으라니. 운영방침이니 뭐 어쩔 수 없었다.
두 명 이상 들어가면 서로 부담을 느낄 법한 크기의 녹음실에 혼자 들어갔다. 가수 박진영과 비가 함께 출연하는 유투브에 나온, JYP 사옥 내 녹음실을 연상케하는 구조였다. 앉아서 할 건지 서서 할 건지 선택하라고 하셨다. 좋은 발성을 생각하면 서서하는 게 좋겠으나, 3단 고음을 할 일은 없으니 앉아서 하겠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냐고 여쭙자,
“제가 녹음 받아드려요. “라고 하셨다.
녹음을 받는다는 말이 왠지 멋졌다.
마이크를 통해 기계 속으로 들어갈 내 목소리가, 내가 쓴 내레이션이 대단히 멋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고르고 고른 말들,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모든 균형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말들. 한글파일에 마구 쓰다가도 혹여나 날라갈까 몇 번이고 저장했던 말들.
그 말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읽는 동시에 최선을 다해 들었다. 혀끝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고 내가 내는 아주 작은 숨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방음벽 건너의 한 사람이 다 듣고 있었다. 한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내 몸에서 나는 모든 소리, 그리고 헤드폰 너머로 들리는 엔지니어 선생님의 디렉팅 목소리였다.
말들의 의미와 소리에만 오롯이 집중하니 소리에 예민해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눈 내린 새벽을 오디오로 옮긴 버전 같았다.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