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달려온 글로벌 메가시티 서울의 개발역사, 심시티 관전기
작년 한해 벤츠의 최고급 S클래스는 국내에서만 1만200대가 팔렸다. 전세계에서 S클래스가 1만대 이상 팔리는 나라는 중국과 미국, 한국 밖에 없다. 예전에는 벤츠 S클래스는 수입 호화사치품의 대명사였고 세무조사의 타깃이 될까봐 사장님들은 좋든 싫든 현대차의 각그랜져 정도에 입맛을 다셔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연간 수입차만 24만대씩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계를 딱 60년 전으로 돌려보면, 그때는 대한민국에 있던 자동차는 전쟁때 미국이 남기고 간 지프차 1700대가 전부였다. 예나 지금이나 수입차인것은 같지만 이건 뭐 거의 수직적인 신분상승이 아닌가.
이러한 급변의 시기동안에 부동산시장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실물시장 (Space Marekt)과 자본시장(Capital Market)을 각각 구분하고, 일단 이번 장에서는 실물시장 위주로 서울의 도시개발역사에 대해 훑어보고 다음번에는 자본시장쪽의 집값에 대해 알아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앞서 뉴욕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라고 소개를 하긴 했지만 사실 서울은 뉴욕이 명함도 못내밀 만큼 62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뼈대있는 도시다. 콜럼버스가 미국대륙을 발견한건 우리가 서울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100년 후의 일이었고, 제 아무리 뉴욕이 난다긴다 해도 그 역사는 서울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 하지만 서울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외세의 침략과 6-25전쟁 등으로 건물, 교량, 기반시설들이 다 무너져 버린 때문에 1960년대부터 그것도 밑바닥에서 부터 도시가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의 도시개발역사는 나같은 젊은 사람이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간접경험만으로 이랬다 저랬다 얘기하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원리와 원칙보다는 효율의 가치가 앞서던 한국의 70~80년대는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 안되는 부분들이 많고 안타깝지만 서울의 역사는 이 어둠의 시대를 살아온 힘있는 형님들이 하신 일들을 들추지 않으면 설명이 안되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충분히 살펴 심시티 게임 관전 수준으로 일단 살펴보기로 한다.
전쟁 직후의 한국은 자원과 재정이 부족했다는건 모두가 알터이다. 게다가 일제가 조선인 기술자 양성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나마 있던 기술자도 이북에 남아있어서 한국전쟁 복구계획을 추진할 인재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학교에 행정대학원이 설치된 것이 68년이었으니 서울의 첫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였던 여의도의 경우, 첫 설계팀은 한국건축계에서는 김연아? 정도의 스타였던 김수근을 위시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팀을 꾸렸지만, 당시 나이가 25~30세에 불과했다. 지식이나 경험이 있어서 일하는것이 아니었고 '까라면 까'야 하는 진정한 창조경제의 시대였으니 이해는 된다. 반면에 1955년 휴전직후 서울 인구는 150만 정도였는데 그 후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하자 1959년에 2백만, 1968년에 4백만, 1980년에 830만으로 두배씩 성장했다. 그에 맞춰 집을 짓고 도로를 깔고 지하철과 다리를 짓고 상하수도, 전기 시설을 확충하는 전방위적인 작업들이 필요했다. 전문성도 경험도 없었던 당시에 무에서 유를 창출한 아버지 세대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당장에 필요한 시설자금 조달은 당췌 어떻게 가능했을까?
집앞에 도로가 나거나 지하철 역이 생긴다고 하면 땅값이 오른다. 하물며, 당시 돈없는 서울시가 이런걸 몰랐을리가 없고, 그들은 진정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았지만 땅에서 솟은 땅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처음 삽을 뜬 곳은 여의도 였다. 일제시대에 비행장으로 쓰이던 여의도는 한강물이 범람하면 물에 잠기는 백사장이었는데 강변가에 거대한 제방(울타리)을 치고 그 안에 흙을 덮으면 홍수가 나도 넘치치 않는 우뚝 솟은 섬이 되어 버린다. 서울시는 이렇게해서 87만평을 조성해서 광장, 도로, 공원등을 만드는데 32만평을 사용하고 나머지 땅을 팔기 시작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것처럼 남이하면 기획부동산이지만 내가 하면 국토개발이 되는 것이다. 이덕에 서울시는 지하철 만드는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수 있었고 석유파동도 무사히 넘길수 있었다. 당시 첫 입주신청은 국회의사당의 10만평이었고 시범아파트의 성공에 힘입어 각종 아파트 개발사, 종교시설, 기업 등에서 흙먼지 풀풀 날리는 허허벌판에 감사하게도 묻지마 투자를 해줬다.
여기서 재미를 본 서울시는 이와 비슷하게 한강변을 두텁게 돋운 다음 강물이 넘치지 않게 하면 어마어마한 땅이 그냥 생긴다는 것을 알고 구 반포지역, 동부이촌동, 서빙고동, 흑석동, 압구정동, 구의동, 잠실 할것없이 한강변을 정비하면서 닥치는 대로 돈되는 사업을 벌여서 땅을 팔아 재꼈다. 전문용어로는 '공유수면매립'이라고 하고, 건설사들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만?으로 한강에서 모래를 퍼다가 그 옆에 흙을 쌓는 공사를 발주받아 공사를 하고 다시 그땅을 불하받아 아파트를 지었고, 이내 집들은 날개돋힌듯 팔려나갔다. 현대의 재벌로 발돋움한 기업도 처음에는 이런 사업을 통해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개발시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도로와 터널, 지하도로, 고가도로등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러 도로시설중에 가장 핵폰탄급 펀치는 아마도 한남대교 (제3한강교)였다. 지금이야 '우와~ 그런때가 다 있었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당시 60년대 말 서울시민 (강북)들은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한강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에 대한 우려가 컸다. 전쟁동안 한강에서 발이 묶여 가족들과 생이별하거나 북한으로 끌려간 이들의 사연까지 굳이 안가더라도 68년에 북한의 간첩들이 기관총 수류탄들고 청와대 문앞까지 쳐들어와서 '대통령 목따러 왔수다'라고 하는데 신변의 위험을 안 느끼는게 이상할게 아닌가. 서울시민들에게는 유사시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할수 있는 다리가 절실히 필요했다. 제2한강교는 군사용이어서 서울에는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나룻배를 타서 건너야 했다. 특히, 포병장교 출신으로 북한에서 포를 쏘게 되면 강북은 불바다가 될 것임을 정통하게 알고 있던 박통께서는 한강이남으로 도시를 분산시키는 정책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당시 깡촌 강남에 강북의 귀한 분들이 편하게 내려가실수 있도록 만든것이 오늘의 한남대교다.
그러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67년에 박통께서는 사전에 다른 부서들과 조율도 없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라는 통큰 공약을 내뱉어 버리셨다 (당시에는 그분 말이 곧 법인 시대였으니까). 당시에는 한국의 형편에 전국의 자동차를 다끌고 나와도 고속도로를 채울수가 없을 거라고 양김 (YS&DJ) 선생님께서는 결사반대를 외치셨다고 한다. 어쨋든 소뒷다리 걷어차는 격으로 경부고속도로까지 덤으로 얻게 되자 강북과 전국을 잇는 교통망이 한남대교를 통해 연결되어 제3한강교는 69년 12월에, 경부고속도로는 70년 7월에 개통되었다. 강남개발은 내용도 많거니와 땅값에 대한 부분이 많아 다음회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겠지만 한남대교는 수도권의 큰 축을 놓고 봤을때에도 경기남부지역으로 끊임없는 팽창을 유도하게 된 신호탄이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76년에 착공되면서 강북에서 강남을 잇는 추가적인 다리가 필요했고, 없는 예산에서 궁여지책으로 여름철 홍수가 나면 잠기기는 하지만 싸게 빨리 지을수 있는 잠수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산에는 구멍을 하나 더 뚫어 남산 3호터널을 통해 도심에서 강남 가는 길을 한결 쉽게 만들수 있었다. 이렇게 서울의 도심과 강남의 접점이 하나씩 늘어갔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강남이 강북을 따라잡은 결정적 계기는 지하철이었다. 1978년 당시 국민 소득 1100달러에 1호선 건설부채도 전혀 갚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시는 장장 54km짜리 2호선 착공이 들어갔다. 당시 금액으로도 8700억원이 들어가는 어마무시한 공사였다 (당시 국민총생산대비 부담금액의 크기를 오늘날의 국민총생산대비 환산하면 95조원에 해당). 하지만 2호선의 개통 효과는 어마어마했고 개통직후까지 서울시 인구증가의 85%가 강남에서, 그중 70%가 2호선 라인을 따라서 나타났다.
79년 박통이 서거하고 80년 전두환정권이 집권하면서 서울은 또 한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그 변화의 큰 축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었다. 한강종합개발을 통해 전체 한강 주변환경이 한번에 정리가 됐고 지금의 올림픽대로가 이때 만들어졌다. 지하철 2호선이 부분개통된 82년까지 테헤란로에 들어선 건물은 거의 없었지만, 2호선이 완전개통된 84년 이후부터 올림픽 기간까지 무역회관(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르네상스호텔 등 20층이 넘는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때깔좋은 강남의 이미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88서울 올림픽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김포공항에 내리기 직전 번듯한 아파트촌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과 단시일에 대규모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해 정부는 목동을 지목하여 불과 5년만에 25개 건설사가 약 2만 7000가구의 아파트를 찍어냈다. 비행기에서 한국을 살펴보기 위한 외국인들을 위한 아이캐칭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잠실에는 종합운동장 시설들과 올림픽 관련 시설들, '꿈과 환상의 나라 롯데월드'가 올림픽을 기점으로 동양최대 규모의 다목적 건물로 들어섰고 잠실 개발도 본격화 됐다.
81년 9월에 88서울 올림픽이 확정되면서 이미 800만 인구를 돌파한 서울은 83년 들어 땅값도 아파트값도 폭등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두더지 잡기게임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오면 방망이로 두드리는 것처럼 문제있는 지역마다 투기억제지역으로 묶어버렸지만, 손바닥으로 파도를 막는 격이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던 전두환 정권은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내어 놓는다. 오늘날의 원룸인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이때 나오게 됐는데, 이는 똑같은 설계도로 몇달이면 뚝딱 집을 짓는 집장사의 효시가 됐고 전문가들은 한국의 주거환경을 제대로 악화시킨 원흉이라 무척 싫어라한다.
한국의 1980년 국민소득은 1600불이었지만 1988년에는 4000불을 넘게 됐다. 당시 세계 경제상황은 3저현상이라고 해서 저환율, 저금리, 저유가덕에 한국은 해마다 평균 10% 이상 성장했다. 한국경제가 '제일 잘나가'고 있었으니 당연히 집값은 겁나게 올랐다.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의 경우 1989년 1~4월에만 23%가 상승했다. 집값이 오르면 당연히 월급을 올려달라는 노사분규가 발생하고 집값이 폭등하면 어차피 다른집도 같이 오르기 때문에 돈 번사람은 더 많이 번 사람때문에 속상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그 박탈감에 판을 아예 뒤집어 엎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정부에서는 집값을 잡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 때 노태우는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을 걸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집값을 누그러뜨리는데, 아니 뭉개는데 성공했다. 목표년도인 1992년보다 1년이 앞선 1991년말까지 무려 214만호의 주택을 밀어넣기로 만들어냈다. 이때 분당과 일산을 포함한 5개 신도시가 건설되어 약 30만호가 만들어졌다 (분당 10만, 일산 7만, 중동-평촌-산본 13만). 집값이 오르기도 전에 새집이 쏟아지니 이 여파는 몇년간 지속됐다. (물론 부실공사가 만연해졌고, 임금상승을 부추겼다는 비판과 다세대-다가구가 폭증하는 바람에 주거의 질이 열악해졌다는 비판이 뒷따르기는 했다.)
서울의 아파트단지만 뽑아보면 1960년대 말 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시작하여 1970년대 들어 여의도로 번졌고 1970년대 후반에는 압구정, 1980년대에 걸쳐 강남과 서초, 잠실로 번져갔다. 이당시 세무공무원 정태수의 한보주택은 대치동에 4400세대 짜리 은마아파트와 2400세대 짜리 미도 아파트를 지어 세간을 놀라게 했으며 보일러업자였던 한신공영은 잠원동과 반포동에 신반포 1차에서 27차에 걸쳐 모두 129개동 11,600세대를 짓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들 아파트들이 성공할수 있었던 요인들로는 정부의 정부기관 강남이전 및 세금등의 지원책도 있었겠지만, 특히 허허벌판에 주거단지를 옮겨놓으면서 던진 미끼가 워낙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강북의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옮기고 8학군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가장 명문인 경기고를 숱한 반대를 무릎쓰고 삼성동으로 먼저 옮겼고 현대그룹이 사립재단인 휘문중고등학교의 건물을 인수하면서 그들은 대치동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그리고 숙명여중고, 서울고, 중동 및 동덕, 경기여고 등등이 신설학교로 시설과 교사들을 업글해서 이전했고 그 인근 지역들은 신흥 부촌이라는 격에 맞게 8학군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형성하여 대표적인 강남 프리미엄 또는 기득권을 가지게 된다.
서울이 그렇다고 새로운 땅만 개발하느라 골몰한 것은 아닐진대, 강북지역에서는 도심 재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다. 60~70년대 당시만 해도 무허가 판잣집이 서울 도심에 가득차 있었던 때이니 만큼, 서울시는 도심 지역을 크게 묶어서 재개발 지구로 지정을 했고 낡은 건물을 헐고 큰 고층빌딩을 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소상인들은 자신의 건물이 헐리고 쫓겨난다는데 대한 강한 거부와 저항을 시작했고, 서울시는 관계자들을 모아다가 외국의 사례들을 보고 오라고 시찰을 보내 버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외국 여행이 철저히 제한되던 시기였으니 미국 뉴욕과 런던, 프랑스 라데팡스, 일본 도쿄의 도심을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은 크게 깨닫게 되었고 도심 재개발과 고층 대형화에 공감대를 모으는 계기도 됐다. 하지만, 이런 도심 재개발을 감당할 수 있는 주체는 대형회사밖에 없었고, 한국화약(현 한화)의 소공동 빌딩 및 플라자호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의 삼성본사, 교보생명의 광화문 교보빌딩, 소공동 롯데타운등이 이때 올려지게 된다.
그 후 업무 및 상업지역은 80년대 이후 서울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는 도심의 중심상업지구를 CBD (Central Business District)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파생된 용어로 강남 GBD (Gangnam Business District), 여의도 YBD (Yeoido Business District)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지구가 다핵화 되어 흩어져 존재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따로 설명을 하면 좋겠다. 다만, 여의도와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그만큼 상업/업무지구들도 해당 지역과 함께 성장해왔고, 90년대까지 3개 권역이 개발되다가 그 이후로는 분당BBD (Bundang), 판교, 상암, 인천 (송도), 구로 가산(디지털단지)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공기업들이 지방으로 분산되고 행정수도가 이전하면서 2016년 이후 서울의 상업지역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이미 강남에는 빌딩 공실이 높아져서 떨어지지를 않고 있고 모건스탠리는 몇해 전 3000억을 손해보고 서울역 앞의 서울스퀘어 (구 대우빌딩)를 매각했고 부동산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입맛을 갖고 있던 삼성도 3세 경영이후 그토록 아끼던 부동산을 팔고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