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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촌네글다방 Mar 29. 2024

우연과 실패의 향기

감상문


0. 인트로: 여행의 이유 소개글


1. 국내 여행기는 진부하잖아?

 

 요즘은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존재들을 사색하는 깊이는 깊고, 묘사법은 색다르다. 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여행'인데, 나의 자아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전 여행 경험들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꽤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여운이 가실 때쯤, 이 책의 감상을 시작하였다.

 


 사실 국내 작가의 여행기에는 강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 흔히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젊은 국내 작가들이 쓴 여행기는 관광기에 가까운 책이 많았다. 여행의 밝은 면만을 강조하는 그 책들의 응당 위치해야 할 곳은 서점보다는 여행상품 판매에 목적이 있는 여행사의 입구여야 한다고 느낄 정도로, 여행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만을 강조한다. 분홍색과 귀여운 아이콘으로 장식된 표지와 작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여행의 이유도 선입견의 레이더를 벗어날 수 없었다.(부끄럽지만, 이 작품 전에는 김영하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첫 챕터를 마무리한 후, 작가와 이 책에 대한 오해는 이미 기억 뒤편으로 날려버렸다.


2. 삼삼하고 조화로운 비빔밥 맛

  책의 전체적인 느낌은 초장 없이도 간이 삼삼하게 배어있는 육회비빔밥 한 그릇과 비슷하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엮어낸 각 문장들은 갓 지은 밥과 신선한 채소들의 플레이팅을 보는 듯하며, 나긋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문체는 저자의 여행 경험이라는 재료를 맛깔나게 담아내는 황동 놋그릇과 같다.

 여행은 사적인 경험이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와 울림을 주긴 쉽지 않으나, 저자는 문단과 주제 간의 공간감을 보장함으로 독서의 경험을 사유화할 여유를 제공한다. 동시에 과시 없는 인문학적 소양을 한 숟갈 보태어 자연스레 '나'의 여행이 내 인생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반추하게끔 한다. 놀라운 흡입력을 가진 이 책을 통해 내 생을 돌이켜 보니, 영혼이 느끼던 허기를 채운듯한 느낌이다. 마치 배를 든든하게 해주는 육회처럼 이 책의 영양가는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리라.

 

3. 맛깔나는 첫 번째 챕터

 이 책의 영양분을 제대로 음미하는 데는 필요한 시간은 20분이었다. 첫 번째 챕터인 '추방과 멀미'는 이국적인 체험을 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여행 에세이의 시작점으로 삼기에는 부적합해 보이는 글이다. 왜냐면 이 글의 소재는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계획한 한 달간의 상하이 거주 계획이 무산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무지로 중국 관광비자를 준비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추방기는 통상적인 여행기와는 다른 시작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경험을 통해 소설을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고, 꽤나 돌아오긴 했지만 상하이에서 이루고자 한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챕터를 마무리한다.
 

4. 실패는 내 인생의 9할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우연과 실패가 가지는 미학에 대해 생각해봤다. 누군가가 나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인생의 9할은 우연이 낳은 실패의 역사다.'라고 말할 것이다.


9천번 이상의 슛을 실패하고, 300경기 이상을 패배한 마이클 조던

  살면서 타인이나 사회를 향해, 자신 있게 '내가 이뤘어! 성공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해냈다'라는 감정을 알려준 경험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한 순간이다.

 

 한때 전주에는 연합고사라는 제도가 있었다. 졸업을 앞둔 중3은 전부 응시해야 했으며 일정 수준의 커트라인을 통과해야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일종의 수능 같은 제도였고 이를 통해 받는 압박의 수준은 상당했다. 중3을 앞두고 난 담임선생과 면담을 가졌는데, 학급성적은 뒤에서 10번째 혹은 중위권 수준이던 나에게 담임은 '그렇게 공부할 거면 농업고등학교에나 진학하렴.'이라는 막말을 나긋하게 내뱉었다. 당시에 비인문계 고등학교(농고, 공고 등)는 불량학생들이 진학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강했다. 그래서 담임의 막말은 어른들이 나를 그러한 부류로 취급한다는 암시와 같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곧 분노로 이어졌고, 실패자로 낙인찍히지 않겠다는 추상적인 목표를 연료 삼아 중3학년 때는 반에서 10등 이내로 성적을 끌어올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평균적인 학업 수준 달성에 실패한 학생이었고, 그러한 시각이 나를 각성시켜준 것이었다.



5. 실패와 시도=성장의 거름

 모든 성취 뒤에는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첫 취업 뒤에는 지원한 회사의 인사담당자가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누른 수많은 지원서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 뒤에는 이성관계로 인해 겪은 아픔과 '진짜 사랑'을 찾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비로소 확립한 건전한 자존감 뒤에는 스스로를 실패 덩어리라 부른 혐오 덩어리의 내가 존재했다. 하지만 난 과거에 실패한 나 조차도 사랑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했으며,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이해하고 포용해야지만 인생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돌이켜 보면, 나 혼자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하기에도 많이 조심스러워진다. 왜냐면 실패 뒤에는 무력감이 따라오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는 나를 소중히 여긴 주변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섣불리 누군가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주기도 망설여진다. 왜냐면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실패의 감정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내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좌절위에 피어난 은은한 향기

 들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들꽃의 내면적 아름다움과 은은한 향기는 그것과 비슷한 존재로 여겨지던 자들만이 주목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일까? 인생의 굴곡에 잠식당하지 않고 이겨낸 사람은 들꽃과 닮은 점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들 또한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지언정, 일상적인 존재들의 소중함이라는 백신으로 실패라는 열병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나는 믿는다. 일상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실패가 선사하는 자기 파멸적 작용을 이겨낼 수 있고, 자아의 뿌리는 더욱 강건하게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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