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0. 인트로
1. 사춘기 vs 부모
'해리포터: 저주받은 아이'와 '레이디 버드'가 다루는 소재는 불행했던 유아시절을 보낸 부모와 사춘기에 접어드는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쌍방은 갈등의 생성-회피-직면-극복 이라는 서사에 진입하게 된다. 해리포터는 마법과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사용해 서사를 풀어가고,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입학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으로 극을 전개한다. 이벤트의 형식적인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서로를 부정하고자 했던 부모자녀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눈빛과 손길을 내밀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2. 묘하게 닮은 알버스와 크리스틴
저주받은 아이는 초등학생(혹은 중학생) 이후로 처음 감상한 해리포터 시리즈이다. '철부지 꼬맹이가 이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니, 나도 참 꽤나 나이 먹었구나.'라는 푸념이 자연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덤블도어 스네이프 포터'로 별명을 붙여도 할 말 없는 이름의 소유자인 알버스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죄의 이름은 '전설적인 영웅의 호칭을 지닌 아버지를 둔 죄'인 듯하다. 뭘 하더라도 '해리의 아들'로 불려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도 서러운데, 인생에서 볼꼴 못볼꼴 다 본 아빠는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 알버스 이 어린것아.'라는 꼰대 마인드로 알버스의 자유의지를 억누른다. 거기에 혼잣말하는 깔때기 모자는 알버스와 말포이네 아드님을 묶어서 넌슬딱 (넌 슬리데린이 딱이야)을 시전한다. 이쯤되면 내가 알버스라도 '세상이 날 억까하네?'라고 느낄 것 같다.
레이디 버드의 여주인공인 크리스틴의 할머니는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였던 듯하다. 그렇게 상처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는 새가 되고 싶은 인간 딸아이를 철부지 없다고 나무란다. ’'뉴욕에서 나의 날개를 펴리라!'로 축약할 수 있는 크리스틴의 꿈은 궁핍한 집안 상황에서는 억까당하기 딱 좋은 소재이다.
빗자루조차 들어올리지 못하는 알버스는 숨 쉴 때마다 '해리의 아들이란 놈이 이렇게 못나서야..?'를 듣게 된다. 그렇게 열등감이라는 이름의 썩은 열매를 품게 되고, 급기야 '10대의 아빠처럼 큰 건 하나 해내고 아빠의 그늘을 벗어나리라!'를 외치며 매슬로우의 자아실현 욕구 충족에 눈이 먼다. 그렇게 세상과 인류와 순진한 말포이의 운명과 타임터너를 무이자로 대출받아 신나게 써먹는데, 역량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해 볼드모트에게 세상을 바치기 직전까지 간다.
레이디 버드도 마법 지팡이만 없을 뿐, 상황은 알버스와 비슷하다. 얼굴에 밥풀 같은 피어싱을 한 오빠 커플과 숨 쉴 때마다 돈걱정과 잔소리를 내뱉는 엄마를 피하기 위해 교우관계를 폭넓게 가져간다. 하지만 수업, 연애, 연극에서 맺는 관계에서도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엉망진창 천방지축 짱구의 하루처럼 일을 터트리는 알버스와 레이디 버드에게 어른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볼드모트의 따님과 해리가 일기토를 벌이고 어른들이 나머지를 수습한다. 레이디 버드는 엄마와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아빠가 어깨를 토닥여주고, 예수님과 사실혼 관계인 원장 수녀님은 레이디 버드의 차량 데코레이션에 감사를 표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을 겪으면서 주인공은 부모들이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고, 부모와 자신을 갈라놓는 심리적 벽에 조금씩 금을 낸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다 처리하고 해리와 알버스, 말포이 부자는 서로에게 웃음을 보이고 레이디 버드는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3. 판타지스런 영화, <레이디 버드>
두 작품의 엔딩을 접하고 난 뒤, 난 레이디 버드 장르를 드라마에서 판타지로 바꾸고 싶었다. 나에게 판타지 작품의 주인공은 용을 때려잡고, 시간 여행을 하고, 지팡이에서 불을 발사할 필요가 없다. 1) 작품의 주인공이 10대일 것 2) 부모와의 갈등이 주요 소재일 것 3)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것, 이 세 가지 요소만 갖추면 된다.
사실 나는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부모의 얼굴을 보고 감사함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주 하지는 않는다. 아마 열번에 한번 정도? 그리고 나이 4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난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입이 굳는 느낌인데, 누군가 나에게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건 볼드모트의 이름을 말하는 것과 똑같아!'라고 세뇌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저들은 10대 때 해냈다니! 픽션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해낸 주인공들과 주변의 등장인물들에게 신기함과 존경심이 동시에 생긴다.
4. 부모라는 이름의 벽
난 30대 초반까지도 부모에게 고마워해본 적이 거의 없다. 만약 내가 주인공들처럼 10대 때부터 내가 있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쌓았다면 부모와의 사이가 지금보다는 더 풍족할 수 있었을까? 아빠랑 같이 술을 마실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을까? 지금도 못해본 부모님과의 1박 2일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후회가 방울뱀 꼬리처럼 시끄럽게 소리를 내려고 한다.
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방울뱀의 뺨에 손가락을 튕기며 제압한다. 난 과거를 부정하거나 바꾸고 싶지 않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의 내'가 바뀐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애착을 가지고 창설한 독서모임도, 나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도, 내가 애정을 갖는 그 모든 것도 없을 수도 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살아간다.
누구나 어두운 과거와 사연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세월이란 바람을 맞으면서 재로 변했지만, 여전히 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그 재를 스스로 털어낼 수 있을때 인생의 향기가 풍겨진다고 생각한다. 난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것들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털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메아 쿨파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건강한 죄책감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10대의 나에게 세상과 어른이란 디멘터와 같았다. 그들은 내 꿈을 부정하고 짓밟으며 무력감과 염세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줬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다 빨려버린 '고딩'인 내가 이번주 토요일, 타임터너를 이용해 독서모임을 갖는 나를 보러오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무사히 한 공간에 존재함에 감사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일 지켜볼 것이다. 과연 고딩인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