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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Aug 24. 2016

사랑의 역사 / 니콜 크라우스

적절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메인 이미지 : 월간 윤종신 2013 January <사랑의 역사> Cover

(물론 그 사랑의 역사가 아니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 니콜 크라우스 / 민음사 / 2006.08


내가 어떤 단어를 고르는지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에게조차 그저 미스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단어는 일단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일종의 취향의 결과로써 세련되게 정제된 것이면서, 또한 가려울 때 긁을 데를 찾는 것처럼 원시적이기도 하다.

-니콜 크라우스. 민음사와의 인터뷰. 2009.01.14


니콜 크라우스는 <남자, 방으로 들어가다(2002)> <사랑의 역사(2005)> <그레이트 하우스(2010)> 3개의 소설로 유명한 미국 작가이다. 그녀의 소설은 Best American Short Stories 2003 그리고 Best American Short Stories 2008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소설은 2010년, 35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뉴요커가 선정한 40대 미만의 작가 2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11년 Anisfiled-Wolf Book Awards에서 <그레이트 하우스>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롱 아일랜드에서 자랐다. 영국 유대인 어머니와 미국 유대인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기술자이자 정형외과의사였으며 유년기 일부분을 이스라엘에서 보냈다. 


크라우스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2001년에 첫 소설을 출간하기 전까지는 주로 시를 썼다.


1992년에 스탠퍼드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해 가을 조지프 브로드스키(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한국에서 소개된 책으로는 1987년에 열린 책들에서 <소리없는 노래>이 있다.)와 만났다. 이후 그의 소개로 이탈로 칼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로 유명하다. 하아... 부럽다.)와 즈비그니예프 헤르베르트(폴란드 시인이자 극작가라고 한다)를 만났다. 브로드스키 사후 BBC radio 3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졸업 이후에는 옥스퍼드에서 학위도 따고, 렘브란트와 17세기 독일 미술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미술사 학사도 딴듯하다.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시에도 많은 재능이 있었던 거 같다.


<사랑의 역사>를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알마'는 굉장히 복잡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듣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실제 니콜 크라우스의 친가와 외가 조부모님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과 역사>를 조부모님들께 헌사한다고 밝혔다.




한때 한 소년이 있었다


57년이 지난 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게 달라진 점이었다. 내가 단어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인정했기 때문에, 또 어느 누구에게도 그중 한 단어도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문장을 썼다.

한때 한 소년이 있었다.


소설은 레오 거스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50년 넘게 열쇠장이로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 일하지 못하는 몸이 된 그는 글을 쓰기로 한다. 젊었을 때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 써 내려간다. 작가는 그를 통해서 작가의 고충을 드러내는 듯했다. 특히 언어(단어)에 대한 레오의 독백에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담겨있다. 인류가 기록을 시작하고, 수많은 단어가 전해지고, 바뀌고, 불어나도 적당한 단어가 없다는 것은 문학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업보일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희로애락이 부족해서 48가지 감정을 정의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감정인지 정의하기 어렵다.


인생은 아룸다워.

"그리고 영원한 농담."


그렇기에 작가는 아름답다를 '아룸답다.'고 이야기 하나보다. 인생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지만,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인생은 언제나 농담 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마냥 아름답지 않을 것이기에 인생은 '아룸답다.'


뭐, 출판사의 오타일 수 있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농담처럼.


사랑하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를 잃었다. 시간을 잃었다. 책을 잃었다. 내가 태어난 집을 잃었다. 그리고 아이작을 잃었다. 그러니,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신까지 잃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내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알리는 표식이라고는 오직 나뿐이었다.


기형도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아무도 펴지 않는 책이라고 했다. 글과 말은 허망하다. 나 자신을 쏟아서 하나의 글을 쓰고 나면, 이내 잊힌다. 많은 글이 쏟아진다. 시에서 일기까지 매일 셀 수 없는 글들이 인터넷의 한편에 올라온다.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한정되어있고, 읽는 사람의 시간도 한정되어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 어제 올라온 글을 잊는다. 몇 달 며칠 몇 시간을 고심하고, 고민한 글들은 쉽게 잊힌다. 사랑의 기억도, 사랑의 흔적도 바닷가의 파도처럼 부서진다.


(... "넌 아주 조금 행복해지고 또 아주 조금 슬퍼졌어." "그럼 행복과 슬픔이 상쇄해서 달라진 게 없겠네." 
"천만에. 오늘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해서 조금 더 슬퍼졌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 넌 매울 둘 다 조금씩 더해져.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프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생각해 봐. 지금 여기 풀밭에 누운 것보다 더 행복한 적이 있었어?" "아니." "그럼 더 슬퍼본 적이 있었어?" "아니." "너도 알겠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니야. 배일라 애쉬 같은 사람은 매일 더 슬퍼져. 그리고 너 같은 사람은 둘 다야." "넌 어떤데? 너도 지금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슬퍼?" "물론 나도 그렇지." "왜?" "너보다 날 더 행복하게 하거나 더 슬프게 하는 건 없으니까.")


내가 사랑한 그녀, 내가 사랑한 그 사람,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

그것은 어디로 흘러간 걸까.



소녀는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책을 열어본다.


27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은

사랑에 빠지고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 연명하는 법을 배우고 내 이름을 딴 종을 가지고 내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특별한 눈빛으로 말했다. "언젠가 넌 사랑에 빠질 거야." 나는 100만 년이 지나도 절대로 그러진 않을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소녀는 아빠를 너무도 사랑한 엄마를 보며 자란다. 그녀는 엄마가 사랑한 아빠라는 존재를 궁금해한다. 동생은 매번 아빠에 대해서 물어본다. 아빠를 떠올린다. 아이는 사랑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이다. 그러나 사랑을 이해하기에 적당한 나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이에게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엄마가 사랑한 아빠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맞서야 해." 아빠가 말했다. "돌을 던지는 건 나쁜 짓이에요." "나도 알아. 넌 나보다 똑똑하니까 돌보다 더 좋은 걸 찾아낼 거다."


아이는 아빠를 추억한다.


용서해 줘. 네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주진 않았어. 아마도 나 또한 네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아니었을 거야.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 있듯이,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으로 가고 싶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존재와 존재 사이의 거리, 존재가 가지는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존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고, 그저 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아마 그것이 사랑이 가지는 본질이 아닐까 싶다. 주는 것.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줄 수밖에 없다. 서로가 어떤 것을 상대에게 원하는 순간 사랑이 가지는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무엇도 가능하지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무능력하다.


내가 무얼 하더라도, 또 누굴 찾더라도 나나 그 사람, 또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빠에 대한 엄마의 기억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 기억들은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엄마에게 위안을 준다. 엄마는 거기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배타적인가 보다.



언어의 역사


인간이 처음으로 사용한 언어는 몸짓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 가운데 손가락과 손목의 가는 뼈들을 움직여서 만들어내는 끝없는 배열로 표현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몸짓은 복잡하고 풍부하며, 완전히 사라지고 말 절묘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침묵의 시대에 사람들의 소통은 더 많았다. 결코 더 직지 않았다.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라도 손은 거의 언제나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언어의 몸짓과 생명의 몸짓은 구분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에게 호감도 반감도 가지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때문에 세계의 절반을 건너 자연재해가 시작되는 것과도 같은데, 이번 경우는 재난이 아니라 행운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 여자는 우연히 전혀 예기치 못한 은혜의 행위로 나를 살려주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며, 이 얘기 역시 <사랑의 역사>의 일부다.


사랑도 일종의 자연재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해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끝난다. 의식적으로 시작할 수 없고, 의식적으로 끝낼 수 없다. 자연이 인간에게 호감을 가져서 재난이 생기는 것이 아니듯, 자연이 인간에게 반감을 가져서 재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은 그것이 가진 법칙을 온전히 수행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행운이나 재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도, 기호의 문제도, 선악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그것은 일어나고, 인간은 그 가운데 있다.


"알마." 내가 말했다.

소녀가 말했다. "네."

"알마." 내가 다시 말했다.

소녀가 말했다. "네."

"알마." 내가 말했다.

소녀가 나를 두 번 쳤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재앙이든 행운이든, 자연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했다.

사랑도 그럴 것이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런 거리에 사람과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은 재앙일 수도, 행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저 가까이 있음을 즐거워하고, 멀리 있음을 아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가까움과 멀어짐의 반복이 결국에 인간에게, 사랑에게 역사가 된다.




Epilogue


지난 사랑은 나에게 어떤 것을 남겨두었는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나의 죽음을 정의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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