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만드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선택과 포기, 내 몸과 마음이 흘린 모든 소리와 흔적 속에서
조용히 만들어져 왔다. 그리고 나는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매일의 삶과 감각, 사랑과 상실, 두려움과 희망 속에서 나는 지워지고, 쓰이고, 다시 써진다. 이 글은 나를 만드는 모든 조각들을 마주하고 기록하는 시도다.
살아내는 법을 배우고, 내 안의 소리를 듣고, 조금씩 나를 회복하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찾는 기록이다.
무엇이 나를 만드는 걸까. 오늘도 나는 그 질문과 함께, 숨 쉬고, 느끼고, 살아간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내 마음에는 정부를 향한 분노와 세상에 대한 깊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듯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시간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수업을 이어가는 교실의 풍경이 오히려 현실과 어긋나 보였다. 수학여행은 사라졌고, 웃음과 설렘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조심스러움과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나만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아이들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앞에서 이 자유는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잘 살아보겠다고, 숨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도는 이 삶이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학교에서 나도 아이들도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시험 점수나 성적표, 경쟁 속에서 똑똑해지는 것보다 먼저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성취하도록 재촉하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라’라고만 말하는 어른도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호흡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작게나마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서 다시 봉긋 솟아났다. ‘내가 있을 곳은 교실 안이 아니라 교실 밖이 아닐까.’
시스템 안에서 교사의 역할보다 시스템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도시를 벗어나, 익숙한 일상을 떠나,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나만의 토양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졌다.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 ' 너의 감각을 믿어라'
세월호는 나에게 생명에 대한 가치를 다시 묻게 한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잘 사는 법에 대해 생각했지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성공’이라는 단어는 공허해졌고 ‘미래’라는 말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생명들이 국가와 어른들의 무책임 속에서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믿어왔던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안전하다고 미래를 꿈꿔도 된다고
말해줄 자신이 없어졌다. 그 무렵, 똑똑해지는 것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살아 있는 감각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가만히 있으라”는 말 대신 “너의 감각을 믿어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질문 끝에서 나는 내 두 발로 다시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졌다. 나 자신의 감각을 믿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요구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생명이 자주 소모되고 사람은 숫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리듬의 삶을 다른 호흡의 세계를 몸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광화문에서 진도까지 도보 여행
내 온몸의 감각을 다시 살아내고 싶었고, 살아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싶었다. 생각은 많고 몸은 무거워지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점점 내 안에 생명력도 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꺼져버린 불씨를 지피기 위해 지난 4월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진도 앞바다 앞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광화문에서 진도까지 나는 혼자 걸었다.
하루에 몇십 킬로미터씩 아스팔트와 흙길을 번갈아 밟으며 몸은 점점 가벼워졌고 생각은 더 무거워졌다.
걷는 동안 수없이 많은 질문이 나를 따라왔다.
왜 우리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는지, 왜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무력해지는 일인지,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지.
진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어떤 해답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다만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모른 척하며 살 수 없다는 것.
국토 대장정을 마치고 다시 아이들 앞에 섰다.
그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약속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더 많이 말하겠다고.
침묵하지 않겠다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겠다고.
어른들이 만든 구조 속에서
아이들에게 “어쩔 수 없어”라는 말로
세상을 설명하지 않겠다고.
대신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
속도를 늦추는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살아내 보이겠다고.
그날의 약속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다.
정책도, 운동도, 투쟁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나를 다시 길 위로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걷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길 위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 아닌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한 투쟁의 길로
작은 혁명을 시작하기로 했다.
대안 여행을 시작하다.
도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이했다. 마음이 많이 복잡했다. '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하나.' 하지만 걷는 내내 멈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살고 싶었다. 남들이 다 걸어가는 길에서 경쟁하지 말고 나만의 길을 가자고 마음먹었다. 내 마음이 향하는 길. 그리고 하와이에서 하루 만에 강제추방 당해서 해보지도 못하고 멈춰버린 그 꿈을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돈을 '최대한' 쓰지 않고 여행하며 살아보는 것. 돈을 쓰지 않고 여행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살아보자는 실험이자 최소한의 비용으로 장기적인 여행을 하고자 하는 바람이자 다시 한번 세상과 맞짱 떠보고 싶은 객기 이기도 했다. 돈이 최고이고, 돈이 '신'처럼 숭배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은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머릿속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언어들이 부유했지만 가슴은 뜨거워졌다. 이 길이 스스로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번에는 조금 더 안전하게 합법적인 비자를 준비해서 가기로 했다. 알아보니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가능한 마지막 해였다. 인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무조건 호주로 가야 된다는 운명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비자 수속을 마치고 나는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와이에서 1년 전 강제추방 이후 입국 수속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게 남아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심장이 과하게 빠르게 뛰었고, 호주 땅을 밟기 전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봐 예상 질문을 적어가며 답변까지 미리 준비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보여주자 너무 간단하게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이민국 담당자는 서류를 휙 훑어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주에 온 것을 환영해. 좋은 시간 보내.”
그 한마디에 그동안 몸에 쌓여 있던 경계와 긴장, 두려움이 스르르 풀어졌다.
마치 우주가, 세상이, 지금의 선택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것만 같았다.
| 흐름에 내 맡기자
주머니에 비상금을 챙기기는 했지만, 가능한 한 돈을 소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여행은 소비로 채우는 여행이 아니라, 살아보는 방식 자체를 실험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와이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카우치서핑, 숙식까지 제공해 주는 우프,
그리고 호주에서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명상센터 봉사까지. 가능하면 밴 라이프도!
이번에도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인연이 닿는 대로 흘러가듯 내 맡기는 삶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굵직굵직하게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릿속에서 그릴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알 수 없는 어떠한 에너지가 나를 떠받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돈 대신 노동을 내고, 숙소 대신 관계를 얻고, 계획 대신 하루의 리듬에 나를 맡기는 삶.
하와이에서 한 번의 계획 실패와 서른 살의 나이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장기 여행으로 떠난다는 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지금 이 때다' 희미하지만 단단한 확신이 내 안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최소한의 짐과 최대한의 열린 마음으로 호주에서의 첫 하루를 맞이했다.
카우치서핑
한국에 있을 때부터 카우치서핑 사이트에 들어가 호스트의 리뷰를 꼼꼼히 읽었다. 사진만 보고 고르지 않으려고, 소개글을 여러 번 읽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들이고 상대의 에너지와 나의 마음을 들여보며 조금 하거나 성급하지 않게 호스트를 선택하려고 했다.
하와이 여행을 할 때는 그냥 가서 닥치는 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준비했다면 호주는 철저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지만 여러 대안들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확실히 여러 대안을 준비하는 마음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을 덜어주고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실패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내가 조금 성장한 듯한 기분이 들면서 내 안에 지혜도 한 뼘 자란 듯했다.
돈을 쓰지 않고 여행하겠다는 내 안의 어떠한 목표는 있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존엄성이라는 것을 이 여행에서 꼭 지키고 싶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치졸한 방법이나 부도덕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고 나의 에너지를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다. 가령 내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기꺼이 상황을 바꾸자는 마음을 갖고 시작했다. 여행을 하다가 몸이 너무 힘들거나 피곤하면 기꺼이 근처 호텔에 가서 하루 정도는 쉬자. 굳이 돈 아끼겠다고 불편한 공간이나 불편한 사람과 엮이며 하루를 버티지 말자!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실험해보고 싶은 나만의 대안 여행이니까 엄격한 규칙 속에서도 자유로움을 스스로에게 허용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자비이기도 했다. 딱 그 정도의 돈을 주머니에 챙기는 것은 내 마음에 작은 여유를 주었다.
서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호주에서의 첫날밤은 중요했다.
낯선 땅에서의 첫 잠자리가 그 여행의 온도를 결정할 것만 같았다.
호주에 가면 꼭 서핑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어서 골드코스트 바닷가 근처에 사는 호스트를 선택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
호스트와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 역시 나처럼 카우치서핑으로 만난 여행자들이었다.
그 순간, 일단은 안심이 됐다.
‘아, 무사히 도착은 했구나.’
하지만 안도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시간 비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몸은 이미 한계였고,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너무 지쳤지만 흥미롭지 않은 주제들과 대화들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있었다.
호스트는 다른 여행자들에게 근처 관광을 시켜주러 나온 듯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같이 움직이긴 했지만
사실 관광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씻고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웃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움직였다.
노을까지 보고 마트에 들러 대충 저녁 재료를 산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호스트의 집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고급 고층 아파트였다.
그는 마스터룸을 쓰고, 여행자들은 넓은 거실에서 각자의 구역을 정해 자고 있었다.
누군가는 소파를 차지했고, 누군가는 바닥에 침낭을 깔았다.
나는 침낭이 없어서 호스트가 건네준 얇은 이불 하나를 들고 카펫이 깔린 거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여행자들은 스낵이나 빵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나는 너무 피곤했고,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 먹을 기운도 없었다.
“배 안 고파?”라는 물음에 괜히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호스트가 건네준 따뜻한 페퍼민트 차 한 잔을 마시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바닷가의 화려한 아파트 안,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
카펫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날 아주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유롭지만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은, 환대받고 있지만 어딘가 임시적인,
이곳에 있지만 아직은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기분.
그게 내 호주 여행의 첫날밤의 카우치서핑 기억이다..
호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휴대폰을 개통하는 것이었다. 우프 호스트들과 본격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카우치서핑으로 머무는 이 집은 처음부터 ‘정착’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임시 거주지였다.
며칠쯤 머물다 방향을 정하고 다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곳에서의 시간은 더 가볍고, 더 조심스러웠다.
편안함에 기대기보다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머무는 느낌.
짐도 풀지 않았고 마음을 크게 놓지도 않았다.
카펫 위에 깔린 이불 한 장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아직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는 신호 같았다.
이곳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다음으로 가기 위한 중간 지점.
호주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잠시 몸을 내려놓는 정거장이었다
며칠이 지나며 머물던 여행자는 떠나고, 또 다른 여행자가 들어왔다가 다시 떠났다.
이곳을 집처럼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처럼 이곳을 임시 거처로 여기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마음을 깊이 두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호스트는 그런 흐름에 이미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 떠나는 일에도,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일에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었고 잠자리뿐 아니라 대화와 시간까지도 함께 내주었다.
머무는 사람보다 보내는 사람이 더 단단해 보여서 오히려 그게 인상 깊었다.
사람이 계속 바뀌는 집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처럼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며칠을 지내다 보니 호스트는 어쩌면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 넓은 집에 혼자 머무는 시간보다 젊은 여행자들로 집이 북적일 때 그의 표정이 더 살아나는 것 같았다.
혼자 있는 고요함보다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 낯선 언어와 웃음소리, 잠시 스쳐 가는 관계들이 그에게는 삶의 에너지가 되어주는 듯했다. 누군가의 하루를 잠시 받아들이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보내주는 그 리듬 속에서
그는 외로움을 관리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생각보다 우프 호스트와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고, 다시 연락을 해보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적어도 서너흘 정도 머물려고 했던 계획보다 카우치서핑으로 보내는 날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며칠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임시라는 전제 위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도 마음도 점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진 고층 아파트가 점점 답답하게 느껴졌다. 매일 밤마다 새로운 여행자들의 파티도 점점 지겨워져 갔고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나의 정체성 또한 혼란스러웠다. 어서 빨리 몸을 움직이고 나의 쓸모를 찾고 싶어졌다.
드디어 우프 호스트에게 연락이 왔다. 며칠 동안 전기가 끊겨 인터넷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부터 바로 와도 괜찮고, 교통이 불편하니 내가 머물고 있는 근처까지 직접 오겠다고 했다. 짧은 이메일이었지만 문장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자 그동안 마음 한편을 붙잡고 있던 불안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안도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날 밤, 며칠간 편히 머무르게 해 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인 마트에 들러 김과 참기름, 쌀, 김치를 샀다.
김치볶음밥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함께 머물던 여행자들과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대부분 버짓 여행자들이라 한 끼를 과일이나 시리얼, 스낵으로 대충 때우며 살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날은 하나둘씩 자기 가방 속에 아껴 두었던 식량을 꺼내기 시작했다.
조금 남은 치즈, 반 봉지의 파스타, 마지막으로 남겨둔 소스까지.
식탁 위는 금세 각자의 삶이 모인 풍경이 되었다.
사실 그날, 나는 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식당에 가서 한 끼를 사 먹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돈으로 쌀을 사서 여럿이 나눠 먹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쓰긴 했지만 그 소비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기쁘게 쓴 돈으로도 이렇게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날 처음으로 몸에 와닿았다.
그때 깨달았다.
돈을 안 쓰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옥죄는 여행보다 돈을 덜 쓰면서도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방식의 여행이 내가 오래가고 싶은 길이라는 것을.
그날의 밥상은 이후의 여행을 대하는 내 태도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꿔놓았다.
우프 여행 : 지속가능함을 배우다.
나의 첫 번째 우프 호스트는 도자기를 굽고, 뒷마당에 작은 텃밭을 가꾸며 혼자 살아가고 있는 멋진 중년의 여성이었다. 백발에 칼 단발을 하고 노란색의 귀여운 세단을 몰고 나를 데리러 왔는데 첫눈에 반해버릴 만큼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아우라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잘 늙어간다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백발에 주름도 많은 백인 얼굴이라 처음엔 나이가 꽤 많아 보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환갑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놀라웠다.
손이 많이 가는 주택에서 혼자 살며 웬만한 일은 척척 해내는 모습,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태도는
그 자체로 충분히 멋졌다.
2층짜리 집을 직접 지어 1층에는 도자기 작업실과 작은 빈티지 숍을 운영하고 남는 공간 일부는 세를 주었다.
뒷마당 텃밭에서 기른 작물들로 대부분의 식사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내가 막연하게 꿈꿔왔던 ‘어른의 모습’에 가장 가까웠다.
그녀의 삶은 단순히 ‘시골에서 혼자 사는 멋진 중년’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그녀는 *파마컬처(permaculture)*라는 철학을 삶 전체에 심어 살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 퍼머 컬처 (Permerculture)
그녀에게 집은 편의를 극대화한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장소였다.
그녀의 집에는 상수도도, 하수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지붕 위에는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 물로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텃밭에 물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말했다.
“물은 언제나 유한해. 그냥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게 아니니까.”
첫날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져온 세면도구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친환경 제품이 아닌 샴푸나 비누 샤워 젤 등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수도가 없기 때문에 화학성분이 강한 제품은 그대로 토양으로 흘러가서 오염된다는 이유였다.
대신 그녀가 만든 친환경 샴푸바를 사용하게 허락했다. 엄격했지만 다정한 말투였고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불편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의 샤워는 짧고 간결했다. 뜨거운 물을 오래 틀어놓는 일은 없었고, 물이 바닥으로 흘러가는 소리에도 그는 늘 귀를 기울였다.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물을 받아두고, 최소한의 물로 그릇을 씻었다.
그 과정은 불편하다기보다 오히려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깨끗함”을 냄새나 거품의 양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육류보다는 채소류의 식사를 하기에 기름이 없는 그릇들은
헹구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셨다.
내가 사용하는 이 물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충분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무엇보다 텃밭은 그녀의 삶의 중심이었다.
작게 보이지만 치밀하게 설계된 공간에서 채소와 허브, 과일나무들이 서로를 돕듯 자라고 있었다.
한 작물이 다른 작물의 그늘이 되어주고, 뿌리는 토양을 살리고, 남은 부산물은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버려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나무에서 열린 과일들이 식탁에 올라오고 껍질들은 다시 땅의 거름들이 되었다.
모든 것은 순환을 전제로 존재했다.
그녀는 늘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창한 슬로건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선택들이었다.
전기를 아끼는 것, 물을 아끼는 것, 필요 없는 물건을 사지 않는 것,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직접 고치는 것,
먹을 수 있는 만큼만 키우고, 남으면 이웃과 나누는 것.
그녀의 삶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잘 사는 것’이 꼭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녀는 적게 가지고 있었지만,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했고, 자유로워 보였다.
백발과 주름이 많은 얼굴, 손때 묻은 집과 흙 묻은 손.
그 모든 것이 어쩐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나는 그녀를 보며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나도 이렇게 늙고 싶다.'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나이 들어도 참 괜찮겠구나.'
매일 아침 그는 텃밭에서 직접 키운 자몽을 따와 자몽 주스를 만들어주었다. 손으로 하나하나 짜낸 자몽의 쌉싸름한 향이 부엌을 채우고, 그 옆에서는 그가 직접 구운 빵이 식어가거나 따뜻한 수프가 끓고 있었다. 그렇게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현실이라기보다 마치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연출해 둔 장면처럼 느껴졌다.
하루에 해야 할 노동은 많지 않았다. 대략 3~4시간 정도 텃밭을 돌보고, 집 주변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그런 일들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혼자 있고 싶을 때는 그대로 두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는 자연스럽게 곁을 내주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는 종종 차를 몰아 근처 바다나 숲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함께 걷기도 하고, 그냥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며 삶, 나이 듦, 선택, 두려움 같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나눴다. 그 대화에는 조언도, 훈계도 없었고 그저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여백만이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챙겨주었다. 간식이 떨어지면 마트에 데려가 주었고,
내가 계산을 하려고 하면 이건 자신이 해야 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행을 하며 늘 가장 저렴한 것만 고르던 나에게 그녀는 오직 “오가닉”만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입까지 호강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실감했다.
비싸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철학과 배려가 담긴 음식이라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이 너무 과분해서 가끔은 내가 여기 이렇게 머물러도 되는 건가 하는 미안함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가 시키는 일 만 하지 않고 그녀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일, 내가 조금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호주 마트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 각국의 식재료들이 너무나도 저렴하고, 너무나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식재료 코너에는 익숙한 글자들이 보였고,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동, 남미, 유럽의 향신료와 식재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스트의 집은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근처에는 식당 하나 없었다. 외식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호스트는 외식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고, 음식에 대해서도 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식품은 거의 먹지 않았고,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양한 나라의 우퍼들을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다른 문화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라는 말을 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베트남 쌀국수를 한 번 만들어봐도 될까요?”
매일 빵과 서양식 음식만 먹다 보니 입도 마음도 조금씩 지쳐가던 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주방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향신료를 볶고, 국물을 끓이고, 내가 아는 감각과 기억을 총동원해 요리를 했다.
그리고 그 요리는 생각보다 큰 환영을 받았다.
“정말 맛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호스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 요리 실력을 치켜세워주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저녁 요리 담당이 되었다.
김밥을 말고, 부침개를 부치고, 초밥을 만들고, 팟타이를 볶았다.
하루는 한국, 하루는 태국, 하루는 일본.
외딴 파마컬처 집 안 작은 주방에서 우리는 매일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나의 우프 여행은 단순히 일하고 머무는 시간을 넘어 서로의 문화를 나누며 살아보는 시간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결혼하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순간이.
맛있는 음식을 함께 만들고 같은 식탁에 앉아 천천히 저녁을 먹는 시간. 그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충만하다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특별한 이벤트도, 거창한 대화도 없었지만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느낌이 그 조용한 식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가도 참 좋겠다고.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의 끝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오늘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놓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삶.
결혼이란 게 어쩌면 거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런 평범한 저녁들을 기꺼이 함께 반복해 나가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왔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평화롭고 충만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길 위로
이곳에서의 삶은 ‘여행’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스트와의 관계도 깊어졌다.
세대도, 국적도, 인생의 궤적도 달랐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필요할 때 기대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워갔다. 그녀의 오랜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초대받았고, 평범한 장보기와 산책, 저녁 식사까지
그녀의 일상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은 너무도 완전했다.
평생 머물러도 좋을 만큼.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사람과 삶에 정이 들수록 떠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고,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지금 이 편안함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아니면 멈추게 하고 있는지
여행자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지금이, 다시 길 위로 나서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마음을 정리하고 호스트에게 떠날 의사를 밝혔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다운타운에서 우연히 보았던 작은 일식집으로 그녀를 초대했다.
그동안의 감사 인사를 말보다 식사로 전하고 싶었다.
내가 계산하는 걸 끝내 사양했지만 이번만은 꼭 내가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식사였다. 그녀와 보낸 지도 호주에 온 지도 2개월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사흘 만에 도망쳐온 두 번째 우프
우프 호스트들은 원칙적으로 우퍼들에게 숙식 제공을 한다. 하지만 실제 환경은 호스트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떤 곳에서는 동물들이 머무는 헛간이 잠자리이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식사를 전혀 제공하지 않아 모든 끼니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 하루 한 끼만 제공하는 곳도 있고, 술과 고기를 허락하는 곳이 있는 반면 엄격하게 금지하는 곳도 있다.
물론 우프 책자에는 호스트의 성향이나 성격, 철학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문 전에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생활 방식과 규칙을 충분히 확인하고 나에게 맞는 호스트를 선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 번째 우프 경험이 너무 좋았던 탓에 두 번째 우프는 조금 성급하게 결정했다.
두 번째 호스트는 파마컬처로 유명한 크리스털 빌리지에 살고 있는 중년의 부부였다.
첫 번째 호스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땅은 넓고, 집 안에는 호수가 있었고 캥거루도 자유롭게 오갔다.
우퍼가 머무는 방은 고급 호텔처럼 럭셔리했다. 첫날에는 쉬라며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과도한 친절과 대접도 부담스럽고 저녁 식사 내내 틀어놓는 티브이 소리와 시끄러운 대화가 거슬려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면서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음 날, 문제는 노동의 강도나 양만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광활한 잔디밭을 혼자서 하루 종일 깎는 일이 주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쉬어도 되는 건지 눈치를 보며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애썼지만 점심시간이 되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침에 먹은 것은 땅콩잼을 바른 토스트 한쪽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첫 번째 우프 호스트가 보고 싶어 졌고 그리워졌다.
| 흔들림
더위에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결국 눈치를 보다가 집으로 가서 호스트에게 몇 시 인지 물었다. 아내 분은 보이지 않았고 맥주를 마시며 한가롭게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편은 시큰둥하게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했지만 청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남편이 내 점심을 챙겨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도 대충 스낵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가 내 한 끼를 챙겨줘야만 배를 채울 수 있구나 하는 현실에 당황스러웠다. 아직 편하지 않는 이 집에서 내가 함부로 냉장고를 열어 내 식사를 챙겨 먹는다는 것도 어색할 노릇이었다. 다시 나가서 일도 하기 싫고 시무룩한 마음에 테라스에 한참을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멋을 부리고 나타난 여자 호스트는 오늘 경매 시장에서 산 원석을 자랑하며 다가왔다. 어이도 없고 화가 나서 시큰둥한 반응으로 답했더니 할 일은 다 했냐며 무슨 나를 신데렐라 취급하는 거 아닌가?
' 저기요. 저 아직 점심도 못 먹었거든요!' 이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맴 거리고 있는데 오후에 할 일들을 설명한다. 이제 조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이 집은 그동안 우퍼가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호스트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기들이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을 잔뜩 우퍼에게 시킬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우퍼는 숙식을 제공받기 때문에 호스트가 주는 일을 닥치고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지만 나는 단순히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서 내 노동력과 시간을 교환하고 싶지 않았다.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배우고 싶고 그 관계 속에서 지속가능함을 이어나가며 하루하루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럭셔리 고급 호텔 같은 숙소가 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허름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한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계속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결국 그날 저녁 식사 도중에 부부 싸움이 터지면서 밤새 잠을 뒤척이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호스트는 갑자기 이렇게 떠나는 건 안된다면서 화를 냈지만 나는 더 이상 같이 있는 게 힘들겠다는 이유를 말하며 마을 입구에 있는 성당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다. 어디로 갈지 아무 계획이 없었지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첫날 이 부부가 나를 데리러 올 때 마을 입구에서 본 작은 성당이 우연히 생각났다. 일단 그곳에 가서 다음 계획을 세워보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신의 뜻대로
어디 갈 거냐고, 갈 곳은 있냐며 차 안에서 질문을 쉴 새 없이 하던 부부에게 아직 정하지 않았다. 성당에 가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차에서 내렸다. 뭔가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아쉬움과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섭섭 시원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편하게 쉬어지는 것 같았다. 무거운 공기를 며칠 같이 마셨더니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일요일 아침이라 시내는 한산했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시내라 마음이 들떴다. 길가에 퍼지는 갓 구운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조금 전까지의 고민들을 사라지게 했다. 커피 한잔 하며 신문을 보고 있는 어르신 들 모습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 시작 전에 준비하시는 어르신 몇 분이 나를 보시더니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작은 시골마을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이른 아침 성당에 나타는 동양인 여자는 아무래도 처음 보셨을 지도. 나는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고 미사는 한 시간 후에 시작하는데 앉아 있는 건 괜찮다고 하셨다. 미사 시작 전에 분주하게 청소하고 준비하시는데 방해가 되는 거 같아서 잠시 앉아 기도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작고 귀여운 성당이었지만 구석구석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냥 여기 있다는 자체만으로 깊은 안도감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 그래, 하루라도 마음이 편한 곳에 있자. ' 그 길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때 마침 성당 건너편에 보이는 카페에 가서 오랜만에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을 테라스에 앉아 여유 있게 마셨다. 호주에 온 지 2달 만에 처음 와보는 카페에서 마시는 맛있는 커피 한잔에 감동받은 아침이었다.
I CAN HELP YOU
성당으로 돌아와 미사가 끝난 후 신부님은 오늘 새로 온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할 수 있겠냐고 하시길래 나는 우프 여행 중이라고 설명하고 최근에 있었던 상황도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일로 불편해서 지금 도망쳐 나온 상황이라고.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해서 기도 하러 성당에 왔다고 했다. 우프가 뭔지 모르는 어르신 분들도 계실까 봐 농사가 집안일등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거라고 간단히 설명을 했다.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신자분들이 초롱 초롱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길래 한 술 더 떠서 용기 있게 며칠간 숙식을 제공해 주실 분을 찾는다고 했다.
' 밑져야 본전이지 뭐.'
없으면 신부님이 성당에서라도 재워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질렀는데 내 앞에 앉아있던 노 부부가 내 눈을 마주치며 조용한 목소리로 "I CAN HELP YOU"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와? 리얼리? 진짜요?'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신은 나를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노부부 호스트
노부부는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이서 소일거리들을 하며 살아가고 계셨다.
할머니는 퀼트와 바느질, 텃밭을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내셨고 할아버지는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
목수 일을 하며 지내고 계셨다.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각자의 구역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내다가
해가 지는 시간만큼은 꼭 함께였다.
매일 노을이 질 무렵이면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나란히 산책을 나섰다.
혼자서도 하루가 부족할 만큼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한 분들이 모르는 사람을 집으로 들인다는 건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이 떠난 방을 기꺼이 내어주시고 며칠 동안 숙식을 제공해 주시며 아낌없는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두 분의 식사 풍경이었다.
할머니는 이제 요리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며 웃으셨고 대신 할아버지가 식사를 준비하셨다.
서툴지만 귀엽고 무엇보다 사랑이 담긴 손길이었다. 매일 아침 할머니를 위해 직접 커피를 내려주시고 마트에서 산 쿠키 두세 조각을 곁들여 주셨다. 오후에는 어김없이 애프터눈 티까지 준비해 대접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랑해졌다.
덕분에 나까지 공주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두 분 모두 ‘잘 챙겨 먹는 식사’보다는 요구르트, 과일, 견과류, 빵처럼 간단하고 소박한 음식을 즐기셨다.
아침과 점심은 그렇게 가볍게, 저녁에는 꼭 와인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셨다.
와인을 좋아하시는 노부부 덕분에 나는 호주 와이너리와 와인 동굴까지 함께 따라가 보는 행운도 누렸다.
정식으로 우퍼로 고용된 것도 아니고 우프로 등록된 농가도 아니었기에 이 집에서의 노동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지 않아 오히려 내가 할 일을 찾아다녔다.
텃밭의 잡초를 뽑고 마당을 쓸고 헛간을 정리하고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페인트칠을 돕기도 했다.
받는 게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었다.
마사지도 조금 할 줄 안다 했더니 그 솜씨를 발휘해 두 분의 어깨를 풀어드리기도 했다.
떠나는 날, 미루고 미뤘던 지붕 페인트칠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며 여러 번 손을 잡아주셨다.
먹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부부였지만 떠나기 전 한국 음식 한 번은 꼭 대접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텃밭에서 나온 재료들로 부침개를 만들기로 했다. 밀가루만 있으면 가능한 요리라
해외에 있을 때 자주 해 먹던 음식이었다. 재료도 간단하고 비용도 적게 들면서 의외로 반응이 좋은 메뉴다.
밭에서 파를 한 아름 뽑아 파전을 부쳤다.
생전 처음 보는 요리에 두 분은 옆에서 내내 지켜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지셨다.
‘망해도 그냥 한국 음식이라고 우기자’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생각보다 아주 맛있게 드셔주셨다. 그 모습이 고마워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집과의 만남은 정말 하느님이 이어주신 인연 같았다. 매일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걷던 산책길,
노을 속에 나란히 선 노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 한가운데가 천천히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매일 달라지는 노을과 산책길이 삶에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대저택에서 부족함 없이 화려하고 호화롭게 살면서 싸우던 부부의 집을 나와 이 집에 닿게 된 건, 세상에는 정말로 이렇게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게 해주고 싶었던 어떤 배려 같기도 했다.
노부부는 아이들은 다 출가시키고 두 분이서 소일거리등을 하며 살아가고 계셨다. 할머니는 퀼트와 바느질, 텃밭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내셨고, 할아버지는 교수직 은퇴 후에 목수 일을 하시며 같은 집에 살고 계시지만 서로의 구역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내다가 매일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강아지 두 마리 산책하는 일은 꼭 같이 하셨다. 혼자 좋아하는 일만 하기에도 하루가 부족하신 분들이 모르는 사람을 집에 초대한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여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자식들이 나간 방을 기꺼이 내주시고 며칠 동안 숙식을 제공해 주시며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요리하는 데는 이제 전혀 흥미가 없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가 식사를 준비하셨는데 서툴지만 귀엽고 사랑이 담겨있어서 그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매일 아침 할머니를 위해 커피를 내려주시고 마트에서 파는 쿠키 두세 조각을 곁들어주시고 오후에는 애프터 눈 티까지 준비해서 할머니께 대접해 주셨다.
덕분에 나까지 공주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두 분 모두 식사라고 잘 챙겨드시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요구르트 과일, 견과류, 빵 이 정도로 간단하고 소박하게 아침 점심을 드신 후 저녁은 꼭 와인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셨다. 와인을 좋아하시는 노 부부 덕에 나는 와인너리와 와인 동굴까지 따라가는 행운까지 누리기도 했다.
정식적으로 우퍼로 고용된 것도 아니고 우프로 등록된 농가도 아니어서 세 번째 호스트 집에서 노동은 조금 느슨한 편이었지만 할 일도 많이 없어서 할 일을 찾아가며 하루를 보냈다. 텃밭에 잡초를 뽑거나, 마당을 청소하거나, 헛간을 정리하거나, 강아지 목욕을 시키거나, 페인트 칠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고 마사지 실력을 발휘해서 마사지도 해드리기도 했다. 떠나는 날 미루고 미뤘던 지붕 페인트 칠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먹는 거에는 별로 관심 없으신 부부였지만 나는 떠나기 전에 한국 음식 대접 한번 해드리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텃밭에서 나온 재료들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밀가루만 있으면 가능한 요리라서 해외에 있을 때 자주 해 먹는 요리인데 재료 준비나 비용도 저렴하고 간단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거에 비해 인기가 좋은 메뉴다.
밭에서 파를 잔뜩 뽑아서 파전을 구웠다. 생전 처음 보는 요리에 옆에서 계속 쳐다보시며 궁금해하셨다. 집에서 요리를 잘 안 해 드시고 외식도 잘 안 하시는 부부가 파전을 먹어봤을 리가 없겠지. 망해도 그냥 한국 음식이라고 우겨야지 라는 마음으로 했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잘 드셔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이 집 호스트의 만남은 정말 하느님이 연결해주신 것 같았다. 매일 강아지 두 마리와 산책하며 바라보는 노을과 노 부부의 모습이 가슴이 따듯해지고 평화가 채워지는 듯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매일 달라지는 산책코스와 노을이 주는 일상의 힘이 무척이나 컸다. 대 저택에서 호화롭게 살면서 싸우던 부부의 집에서 가슴 졸이던 며칠을 보낸 후 만난 이 노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은 긴장된 온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보듬어 주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노부부의 삶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평온한 리듬 속에 계속 머무는 건 어쩌면 내가 누군가의 삶을 잠시 빌려 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갈지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다음 목적지도, 머무를 기간도 정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서는 조금 더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깊게 듣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계획을 내려놓고 상황에 나를 맡겨보는 실험을 계속해왔듯이,
이번에도 정답을 찾기보다는 흐름 속으로 다시 몸을 던져보기로 했다.
길 위에 서면 또 다른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다시 길 위에 서 있었을 때 마음 한쪽에서 계속 맴돌던 곳이 있었다.
처음 호주에 오기 전부터 꼭 한 번은 가보고 싶다고 조용히 적어두었던 곳.
'명상센터'
돈을 벌기 위해서도,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머무르기 위해 선택하는 여행이
지금의 나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프에서의 노동과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시간이 나를 바깥으로 넓혀주었다면,
이제는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명상센터에서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 속에서 보내고 정해진 시간에 명상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봉사를 한다고 했다.
말이 줄어들수록 생각이 또렷해지고, 생각이 줄어들수록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더 듣기보다 내 안에서 계속 미뤄두었던 질문들과
마주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관광지도 아니고 일터도 아닌 조용히 나를 비워볼 수 있는 곳으로.
명상 봉사 여행
한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열흘 침묵 명상 코스와 봉사를 하며 (담마코리아 위빠사나 명상센터)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위빠사나 명상 센터는 한국뿐 아니라 해외 곳곳에서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첫 코스에서 만났던 한 친구가 있었다.
호주에서 밴 라이프를 하며 살아가던 일본인 음악가였다.
그녀는 한국에 친척 결혼식 때문에 잠시 들어왔다가 우연히 코스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했다.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었고, 이동은 늘 히치하이킹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그날도 코스가 끝난 뒤 부산에 가고 싶다며 목적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누가 봐도 딱 히피 같은 모습이었지만 코스 내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녀 곁에 있으면 마치 고양이처럼 차분하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식사 시간마다 식당 앞에 사람들이 마구 벗어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가 하면,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무거운 기운을 풍기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는 맑고 가벼운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마치 주변의 공기까지 조용히 정화하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나에게 첫 침묵 명상 코스는 솔직히 고통에 가까웠다.
8월의 더위, 명상실 안을 날아다니던 파리, 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
몸은 여기저기 아팠고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그냥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들었다.
코스가 끝나는 날짜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코스가 중반을 넘기던 어느 날, 단체 명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이 없던 나는 스카프로 머리만 대충 가린 채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는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앗, 그녀다.’
서로 발을 맞추어 말없이 걷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안에서 몽글몽글 맺혔다.
명상 코스 중에는 철저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조차 헷갈렸다.
너무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는 현실이 우습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고, 말 대신 마음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명상센터로 걸어가는데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저 멀리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몸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코스도 더 이상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열흘간의 코스가 끝나고 침묵이 해제된 날,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그녀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분명했다.
그녀의 밝은 에너지가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그날의 고마움을 전했고, 그녀의 삶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 가슴을 단번에 뛰게 만든 그녀의 말이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저장되어 나를 호주로 오게 했다.
“나는 호주에서 밴에 살고 있어. 여행하면서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하며 살아.
호주에서 이렇게 사는 삶이 나는 정말 좋아.
그리고 혹시 호주에 가게 된다면 꼭 명상센터에 가봐.
특히 블루마운틴에 있는 센터는 꼭!”
그녀의 이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 덕분에 호주에 가게 된다면 명상센터에 꼭 가보고 싶다는 작은 꿈이 생겼고,
이제는 그 꿈을 곧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 앞에 서 있었다.
코스 신청을 했지만 이미 자리가 모두 차 있어 수련생으로는 참석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봉사는 가능한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답장은 단순했다.
“봉사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그 한 문장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곧바로 길을 나섰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히치하이킹까지 해서 사람의 발길이 뜸한 외딴곳에 자리한
명상센터를 반나절에 걸쳐 찾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안내를 받았다.
“한 시간 동안 침묵 명상을 하고 오세요.”
명상실에 앉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길 위에서 묻어온 긴장과 불안이 조금씩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명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잔디밭 위에 캥거루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서 잠시 현실감이 사라졌다.
'아, 내가 정말 호주에 와 있구나.'
저녁 시간이 되어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주방의 냉장고를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먹을 것이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다.
며칠 만에 제대로 먹는 따뜻한 밥.
반가운 마음에 접시 위에 음식을 가득 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족하지 않음’의 감각이었다.
풍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하루를 돌아보았다.
무사히 도착한 이 하루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 선택이, 그저 감사했다.
Doing 보다 Being
명상센터 봉사자의 아침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수련생들의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아직 밤이라고 불러야 할 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불은 켜졌지만 몸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 커피 향보다 먼저 긴장감이 주방을 채운다.
봉사자는 대여섯 명, 수련생은 여든 명이 넘는다.
아침 식사는 반드시 제시간에 나가야 하고 지연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날의 주방 공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날이 잔뜩 서 있고 모두가 예민한 상태였다.
입안에서 웅얼거리며 말하다가 사소한 일에도 자주 욱하는 호주에서 온 젊은 남자,
틈만 나면 쉬려고 하는 인도에서 온 예순 살 남자,
모든 동작이 정확해야 마음이 놓이는 완벽주의자 일본인 여자,
그리고 눈치를 보며 감을 잡아가는 나,
마지막으로 성격은 급하지만 책임감은 강한
베트남 출신 매니저 여자.
국가도, 문화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영어라는 공통 언어 하나에
모두의 아침을 걸고 모여 있었다.
같은 말을 해도 이해는 제각각이었고 한 번에 전달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누군가는 같은 설명을 세 번, 네 번 반복해야 했다.
통역사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은 순간도 많았다.
베트남 매니저는 사회 경험도 있고 봉사 경험도 많았지만 주방 경험은 부족했다.
시간 분배와 일 분담이 늘 엉켰고 항상 쫓기듯 움직였다.
“빨리, 빨리.”
그 말이 주방의 리듬이 되자
사람들의 손도, 마음도 같이 급해졌다.
언성이 높아졌고 칼질은 거칠어졌고 결국 작은 사고가 났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불편한 감정은 말보다 빠르게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곳은 명상센터였지만 주방은 전혀 명상적이지 않았다.
침묵과 평온을 제공하기 위해 가장 시끄럽고 가장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긴장된 하루를 보낸 후 봉사자들과 지도 법사님이 모여 자비 명상을 함께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 하루 어떻게 잘 보냈냐는 질문 대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계셨다. 봉사자들도 그 짧은 시간에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베트남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 오늘 제가 주방에서 너무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실수가 자주 일어났고 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언성이 오고 갔던 다른 봉사자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제가 아직 주방 일이 서툴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편두통이 심해져서 쉽게 짜증이 났던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누구도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며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 순간 공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지도법사님은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없다면 남을 도울 수 없다고 하셨다. 본인의 체력과 몸, 마음 상태를 관찰하면서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명상은 고요한 방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진짜 수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 시간에 쫓기는 주방 한가운데서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조급함, 판단, 분노가 이 주방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이곳에서는 밖에서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것만이 전부였다.
누군가는 교수였고, 누군가는 음악가였고, 누군가는 아무 직업도 없었다.
하지만 주방 앞치마를 두르는 순간 그 모든 이름표는 벗겨졌다.
남은 것은 피곤한 몸, 조급해지는 마음, 짜증이 올라오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다시 내려놓을 수 있는지였다.
이곳에서의 봉사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기 전에 나 자신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잘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흔들리는 나를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도시에서도, 여행지에서도, 교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평생 필요할 감각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명상을 오래 하면 판단하는 마음이 사라질까? 내 안의 화도 사라질까?'
내 앞에 앉아있는 지도 법사님의 부처님 같은 미소에서 아주 오래전 백담사에서 만났던 비구니 스님이 떠올랐다.
'아 돌고 돌고 돌아서 그 답을 찾으러 내가 여기 있구나.'
| 신뢰가 주는 힘
첫째 날보다 둘째 날, 둘째 날보다 그다음 날, 그리고 또 그다음 날로 갈수록 우리는 조금씩
‘각자’가 아니라 ‘한 팀’이 되어가고 있었다.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이 줄어들수록 서로의 리듬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어디서 손이 모자라는지, 어느 타이밍에 도와야 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일의 속도도 능률도 효율도 조급함 없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신경질을 자주 내던 호주 남자의 얼굴은 어느새 표정이 풀려 있었고 틈만 나면 쉬려 하던
인도에서 온 아저씨도 조금씩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완벽을 고집하던 일본인 여자는 다른 사람의 속도를 기다릴 줄 알게 되었고 나 역시 눈치만 보며 따라가던 위치에서 어디에 손을 보태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툴렀고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주방은 첫날과 전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급함 대신 신뢰가 있었고 통제 대신 흐름이 있었다.
아무도 ‘나 혼자’ 애쓰지 않는 순간, 일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게 흘러간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몸으로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쌓아 올린 마음의 탑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듯하면서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열흘의 코스.
우리는 함께 한 배를 타고 여러 번의 파도를 넘었다.
부딪히고, 흔들리고, 방향을 잃을 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코스의 막바지에 접어들자
배는 조금씩 균형을 찾았고 마침내 순항을 시작하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아도 누군가를 앞서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배는 충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코스 초반에는 수련생들의 에너지도 울퉁불퉁했고 크고 작은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 주변의 긴장도 또한 높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련생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편안함과 여유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수련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방 안에서조차 마음을 살피며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깊이 연결되어 있구나.'
코스 마지막 날 자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수련생들이 하나둘 다가와 말없이 합장을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깊은 무언가가 천천히 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한 일이 크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몫의 일을 하며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인데 그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안전한 하루가 되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나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위로받은 쪽은 오히려 나였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비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순간이었다. 하루하루 정성껏 쌓아 올린 마음들로 큰 돌탑 하나가 만들어진 것 같이 대단한 하루처럼 느껴졌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감정들을 몸에 하나씩 새기며 살아 있는 일이 아닐까.
'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봉사란 애쓰지 않는 것
언어와 문화, 나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명상센터에서의 봉사는,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허락해 준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회생활과는 분명히 달랐다. 새벽 4시부터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지만, 하루 세 번, 한 시간씩 수련생들과 함께 단체 명상을 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또 각자의 체력과 상황에 따라 무리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권유받는다.
이곳은 ‘애쓰지 않음’이 허용되는 곳이다.
애를 쓴다는 것은 곧 무리를 한다는 뜻이고, 무리는 결국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일이 된다.
자기 자신을 해하면서까지 누군가를 돕는 봉사는, 그 마음의 의도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
봉사의 본질은 남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을 정직하게 돌보는 법을 배워가는 데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조금씩 알아갔다.
인도 아저씨
열흘간 같이 봉사를 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제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인도에서 온 60대 아저씨.
부엌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저씨는 모든 일이 서툴고 뒷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아서 꼭 다른 사람이 손을 보태야 했다. 그런 데다가 인도 특유의 여유로움이 주방에서는 게으름으로 보였고, 그 느슨한 속도는 늘 분주한 주방의 리듬을 자꾸만 깨뜨렸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판단했다. 왜 이렇게 답답할까, 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을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상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아저씨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의 서툰 손놀림, 어설픈 미소, 그리고 내가 속으로 쌓아 올린 불편함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기서 봉사하는 게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배우고 싶고 네가 나를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널 보면 우리 아들이 생각나. 사실 우리 아들 얼마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명상을 하기 시작했고 살아갈 힘이 회복되었어. 그리고 이렇게 나 혼자 여행하며 살아가고 있어.
이곳에 와서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 우리 아들도 너처럼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한마디에 마음이 멈췄다.
나는 이미 ‘게으른 사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그에게 붙여놓고, 그 너머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만의 속도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고, 상처들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속도를 늦추고 판단을 멈췄다. 일 하다가 멍 때리며 차를 마시는 시간들도 그에게는 필요한 시간이었고 서툴지만 배우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며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도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그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일을 대신 처리해 주기보다,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답답함이 올라오면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봉사는 누군가를 돕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에서의 봉사는 내 안의 조급함, 우월감, 판단심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하는 연습이었다. 침묵 속에서,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나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허락받고 있었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열흘이 끝날 즈음, 그 인도 아저씨는 여전히 서툴렀고 여전히 느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 공동체란 결국 나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품는 연습이라는 것.
아마 그래서 명상 센터의 봉사는 세상을 돕는 일이기 전에, 다시 세상을 살아갈 마음의 근력을 기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가 명상센터를 떠나는 날,
그는 내 손에 자신의 전 재산이라며 50달러 지폐 한 장을 쥐여주었다.
“이 돈을 꼭 받아줘.”
“왜요? 왜 저한테요?”
그는 잠시 웃더니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나한테는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호주 여행 잘하고.”
그 말은 부탁도, 보상도 아닌 그저 건네는 마음 같았다.
나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돈이 아니라 그가 건네준 신뢰와 작별을 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잘 받는 것 또한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히치하이킹을 해서 공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어떤 여행자보다 가볍고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50달러가 묵직했다.
그 무게는 돈의 무게가 아니라 사람 하나가 내게 남기고 간 마음의 무게였다.
그날 나는 알았다. 가장 가난해 보였던 사람이
가장 큰 것을 내게 주고 떠났다는 것을.
그리고 여행이란, 이렇게 예고 없이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도.
| 일본인 친구
코스 내내 내 마음이 자꾸 향하던 사람이 있었다.
인도 아저씨가 내 안의 판단과 조급함을 드러내게 한 존재였다면, 일본인 친구는 내 마음의 진실함을 자꾸 마주하게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정성을 다해, 진실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코스 초반, 모두가 서툴고 낯설어서 주방 안의 공기가 자주 삐걱거리고 긴장으로 가득 차오르던 순간들.
나는 그때마다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을 조용히, 묵묵히 해내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슬며시 다가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그 한마디가 무거운 공기를 순식간에 가볍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해 노래를 흥얼거렸고, 누군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충분히 고요했다.
질서 있고 단정한 움직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기운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봉사 내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단단함 때문에 괜히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까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먼저 다가와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조급하지 않게 좋은 때를 기다려보자는 마음으로.
몇 번의 식사를 함께하며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욕심껏 담아온 음식은 허겁지겁 먹어야 했지만
그녀와 나눈 대화는 내 배뿐 아니라 어딘가 영혼 깊은 곳까지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졌다.
같은 나이,같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 오는 길이었지만 그녀 역시 나처럼 다른 이유로 이곳에 와 있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그 반가움이 곧 깊은 공감과 연결로 이어졌다.
그녀는 일본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한 그룹 회장의 비서로 일하며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냈고, 때로는 ‘연인 대행’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낯설고도 솔직했고 나는 점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녀의 삶을 크게 바꾼 사건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였다.
후쿠시마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 도쿄로 떠났다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그 사고가 일어났다. 결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친구와는 남자친구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했다.
“후쿠시마에서 온 여자는 기형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녀의 잘못이 아닌 자연재해 하나가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 상처와 슬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더 함부로 대했다고 했다.
어차피 임신도 못할 거라는 생각, 여자로서의 삶은 끝났다는 체념.
감정으로 얽히지 않아도 되는 얕은 관계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요가를 하던 중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고 했다.
깊은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고.
현실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행동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상처 입히고 있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아차렸다고 했다. 그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얕은 만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안 좋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 했다고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어떤 것에서도 좋은 의도를 갖고 살려고 노력 했다고 했다.
깊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요가와 명상을 시작했고,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한참 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그녀가 내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
“명상을 시작하고 뭐가 변했어?”
“….”
뭐가 변했지.
그녀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그 순간 마음에서 바로 올라오는 말을 꺼냈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기로 했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비로소 나 스스로에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녀의 눈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의 말은 상대의 가슴을 여는 힘이 있었다.
진실했고, 투명했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말이 아니라 서로의 방향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말보다 깊은 곳에서같은 파장이 울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명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파동을 세상에 전하고 있는지.
그것만이 진실에 가까운 삶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를 통해 배웠다.
주방에서 화가 올라오면 말없이 칼을 내려놓고
“잠깐 명상하고 올게.” 하고 자리를 비우던 그녀.
감정을 쏟아내는 대신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태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다른 봉사자에게 코스 마지막 날
고개를 깊이 숙이며 “ 나를 성장시키게 도워줘서 정말 고마웠어.”라고 말하던 모습.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알았다.
명상은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마음을 선택하는 용기라는 것을.
참 멋진 친구를 이 여정에서 만나게 된 것에
가슴 깊이 감사가 차올랐다.
| 일상 속에서 명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다.
주방 안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분주하던 일상은 서서히 느려졌고, 소란스럽던 주방도 차분해졌다. 그 변화에 맞춰 내 마음도 조금씩 고요해지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붙잡고 있던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코스와 코스 사이, 센터 안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다.
수리와 보수, 청소와 정리. 장기 봉사자들, 로컬 봉사자들, 그리고 지도 법사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현재의 삶과 과거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바라보는 시간은 유난히 귀하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명상센터 근처의 집에서 살며 수시로 센터에 와서 명상을 하고 봉사를 하며,
봉사자들을 초대해 함께 명상하거나 식사를 나누던 로컬 봉사자 킴의 삶이 유독 마음에 닿았다.
명상센터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살던 중년의 요양보호사 킴은 남편과 오랜 시간 함께 명상을 해왔다고 했다. 호주에 명상센터가 생기기 전, 삼십여 년 전부터 지금의 이 땅 위에 천막을 치고 흙바닥에 앉아 사람들과 명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 세계에 위빠사나 명상을 널리 알린 고엔카 (S. N. Goenka) 법사님이 젊은 시절 이 자리에서 담화를 하면
캥거루와 뱀들까지 옆에 와 평화롭게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덧붙였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명상센터 잔디밭에서 보았던 그 평화로운 캥거루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듣고 있었다.
킴은 우리를 남편이 마당 한편에 만들어 둔 토굴 명상방으로 안내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황토방. 두세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간이었지만 다채로운 빛이 스며들어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의 유리병 조각으로 만든 창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닮아 있었고, 그 안은 마치 바깥의 소음과 부정적인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성벽 안쪽 같았다.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 공간에 서 있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젠가 나도 이런 공간을 갖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올라왔다.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도 부부가 함께 명상하는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햇살 가득한 테라스에 앉아 여유 있게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 풍경 속에서 문득 나의 미래도 이들처럼 단순하고 단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먼 훗날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가능한 한 깊이 만끽해 보자고.
로컬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여행자인 듯, 아닌 듯한 삶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문득 이상한 마음이 올라왔다. 멀리 떠나는 삶이 아니라 깊이 머무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는 마음.
그 생각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나는 늘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머물고 싶은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명확한 답을 찾겠다고 멀리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낯선 풍경 속을 걸었다.
그런데 그 답이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의 반복 속에서,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창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멀리 떠나는 삶보다 깊이 머무는 삶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다음 이야기는 시스템의 통제를 거부하고 반 자본주의, 반 정부주의, 친환경적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실험 공동체 레인보우 게더링에서의 경험과 레인보우 패밀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현재는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글을 잘 쓰려고 하면 자꾸 자기 검열을 하면서 깊어지고 무거워지는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떠한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 가치관이
삶을 구성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구조에 대한 저 스스로 이해가 먼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필터링 없이 써 내려간 글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해방하고 저를 보듬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다시 천천히 이 글들을 재 배치 하고 다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힘을 서서히 가질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한 발짝 떨어져서 저를 바라보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