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삶을 향한 투쟁의 20대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었다.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전쟁과 기아, 끝없이 벌어지는 불균형과 고통을 보며 나는 늘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돕는 사람,
그렇게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었다.
20대 후반 시민 단체, NGO, 사회 운동을 하며 내 꿈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고 싶어서 국제기구 입사를 준비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먼저 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내가 평화롭지 않다면 내가 사는 세상도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면 내가 나 자신을 도울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온전히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이 깨달음은 세상을 향한 나의 열망이 틀렸다는 증명이 아니라,
그 열망이 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부터 나의 아주 작고,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혁명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지금의 나의 세계와 가치관 만든 것일까에 대한 질문
도시에서 실패해서 밀려난 것도 아니고,
도망치듯 내려온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시골살이를 고민했고, 나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내가 어디에 있을 때 몸과 마음 편안함을 느끼는지, 내가 언제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지
내가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나다움이 나오는지 발견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어가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창조하고 싶어졌다.
내 몸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법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내 경험으로부터 나왔기에 원하던 시골살이 삶을 무모하지만 나 혼자서 용기 있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떤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
세상이 원하는 기준이 아닌 내가 원하는 기준을 정하고, 남들이 정한 답을 쫓아가는 대신 나만의 답을 찾아가고 싶었다. 나의 직관을 믿고 내 삶을 맡기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여행에서 실험 한 삶을 이제는 정착해서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평생 여기서 살아야지 하는 대단한 결심을 갖고 시골살이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나의 직관을 믿고 실험하면서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이후부터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를 믿어주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시간을 거슬러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어떤 것이 잘 사는 삶인가, 어떤 것이 성공한 삶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헤매다가 내 인생에서 큰 영향을 준 한 가지 사건이 있다.
내 맡김 여행의 시작
어느 날,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목적지도 없이 배낭하나 들고 무작정 고속 터미널로 갔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어디로 가지?' 고민은 있었지만 답은 내리지 못하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냥 도착해서 끌리는 곳으로 가자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어떠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내 맡김을 실험해 본 여행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내 눈에 속초가 보였다.
바다도 보고 싶고 산도 가고 싶었는데 속초 가서 바다도 보고 설악산에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고 부모님이랑 어렸을 때부터 많이 갔던 곳이라 심리적 안정감도 있었다.
속초에 가는 버스 시간을 보니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간단하게 요기하고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도착해서 돌아다니다가 잘 곳은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마음의 나침반
목적지는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나침반이 향하는 곳은 분명히 있었다. 바다, 산, 이동거리가 길지 않은 곳 그리고 완전 처음 가본 낯선 여행지보다는 여러 번 방문으로 예측 가능한 장소 등. 계획은 모호했지만 선택지를 고르는 내 마음의 기준은 확실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답을 열어놓는 가능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니 바다 볼 생각에 설렜지만 바다보다는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 당시 캐나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캐나다의 길고 긴 겨울을 보내면서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 먹는 거로 스트레스를 풀다 보니 몸이 퉁퉁 부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거울도 안 보고 몇 개월간 살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맞는 옷이 하나도 없고 뭘 해도 예쁘지가 않고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 너 왜 이렇게 살쪘어?" " 살 좀 빼" 만나면 외모 평가하고 지적질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다 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몇 개월 간이라도 운동하고 살 빼서 만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허벅지에 지방 주사도 맞아 봤는데 눈에 띄는 효과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안 만나고 삶의 낙이 없다 보니 식욕조절은 더 힘들어졌다. 낮에는 하루 종일 굶고 자거나 뒹굴 거리면서 보내다가 밤만 되면 더 또렷해지는 정신으로 뭔가를 입안에 물고 있거나 씹지 않으면 허전함과 헛헛함 때문에 밤마다 과자 몇 봉지를 티브이나 영화 보면서 해치웠다. 그러면서 나 지금 먹는 게 없는데 왜 살이 안 빠지냐며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극기야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고 먹는 것을 다 토해해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나 자신을 괴롭혔다.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너무나도 중요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속이 다 망가지고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떠난 게 그때의 속초 여행이었다.
사실 그 당시 내 정신 상태가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그때부터 자주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했었다.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나 잘 가고 있는 거 맞을까?
남들보다 늦게 입학한 대학, 1년간의 휴학, 학점 신경 쓰지 않고 생활한 대학 시절, 점점 더 자신 없어지는 외모, 자꾸 실패하는 연애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인도가 가고 싶어졌다. 왠지 그곳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정말 뜬금없이 떠오른 곳에 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여행지로는 힘든 인도를 선뜻 갈 용기도 없었다.
- 이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진 이유는 내가 왜 속초로 가지 않고 중간에 백담사에 내렸냐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방향이 정해졌다면 목적지는 바뀔 수 있다.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중간에 휴게소에 잠깐 쉬더니 기사 아저씨가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 속초가요. 이 버스 속초 가는 거 아니에요? "
"중간에 백담사 들렸다가 속초 가는 버스야 "
" 아 그럼 백담사에서 내릴 수도 있어요?"
"응, 근데 속초 가는 버스 티켓 샀으면 돈 더 많이 냈는데"
" 아, 네"
휴게소에서 잠시 쉬다 버스는 다시 열심히 달렸고, 나는 그때부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백담사? 인도 가는 대신 여기나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엄마 아빠랑 지나가 보기는 했는데 백담사 옆에도 계곡이 있고 뭐 원하면 설악산에 오를 수도 있고. 절에 가면 공짜로 잘 수 있지 않을까? 돈 내라고 해도 혼자 모텔 방에서 자는 것보다는 괜찮을 거 같은데? '
나는 짱구를 굴리다가 마음이 자꾸 백담사로 향해서 기사 아저씨가 백담사에 도착했다고 차 문을 열자마자 내렸다.
" 차액 거슬러 줄게"
" 괜찮아요. 기사님 커피 값 하세요. 감사합니다."
쿨하게 버스를 떠나보내고 나서 정신 차리고 보니 내린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고 백담사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었다. 백담사라고 써져 있는 이정표만 보일 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서 도대체 백담사가 어디 있는 건가 두리번거렸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산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기분인데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여기가 맞아? 나 잘못 내린 거 아닌가? 아 그냥 속초 갈걸. 이게 뭔 고생이야. 배도 고픈데. 화장실도 안 보이고. 미치겠네'
하지만 다시 내려가서 속초로 갈 수도 없었다. 도대체 백담사가 어디 있는 거냐며 버스 내린 곳에서 한참을 둘러보다가 간이 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 시간표에 내가 타고 온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있는 속초로 가는 마지막 버스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 더 믿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어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믿음과 의심을 오락가락하며 하염없이 걸어 올라갔다.
'언제 도착하지? 도대체 백담사는 어디 있는 거야?'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니 짜증도 나는데 땀도 흠뻑 젖어서 계곡 물에 세수라도 하고 싶어서 계곡 아래도 내려갈 곳을 찾아보았다. 계곡 밑으로 내려가니 바위를 부딪히며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더욱더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고, 흘러내리던 땀도 멈추고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도시에서는 한 여름 폭염으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 계곡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도시에서의 더위가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담갔는데 이 더위에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배낭도 내려놓고 양말도 벗고 발을 담갔더니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콘크리트 정글에서 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 짙은 녹색의 나무들, 힘차게 흘러내리는 계곡에 혼자 앉아 이 호사를 누리고 있다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구나!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발이 얼어붙는 거 같았다. 땀도 어느새 다 식고 몸이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데 그 전과 발걸음이 달라졌다.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흥얼흥얼거리며 하늘도 보고, 나뭇잎도 보며 계곡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서 기와집 같이 생긴 건물 하나가 보이는데 스님들이 왔다 갔다 하시는 거 보니 여기가 백담사인 거 같았다.
도착하니 저녁 공양시간이라 밥을 먼저 먹고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밥 맛이 꿀맛이었다. 밥을 먹고 잠 잘 곳이 있냐고 하니 마침 프로그램 진행 중이니 머무는 동안 프로그램도 참여하면서 지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 당시 절은 공짜라고 생각했는데 숙박비는 있었다. (프로그램 비용 포함) 나중에 알고 보니 시험 삼아 진행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거였다.
절은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할 일도 딱히 없었는데 새로운 경험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하며 열심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명상도 하고, 108배도 하고, 다도도 배우고, 자신에게 편지도 쓰는 시간도 갖고 시계를 볼 틈도 없고 자유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프로그램은 빡빡했는데 힘들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참여자 중에서 제일 어렸던 거 같다.
다들 똑같은 잿빛 옷을 입고,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며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고 지내는 게 편했다. 물론 궁금하기도 했지만 물어볼 틈 없이 프로그램이 빡빡했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져버렸다.
그런데 내가 제일 궁금한 건 다른 게 아니라
' 스님은 도대체 무슨 화장품을 쓰시길래 저렇게 윤이 날 정도로 피부가 좋은 걸까?'
프로그램이 끝나던 날, 4박 5일간 같이 보낸 형제자매들과 툇마루에 앉아 마지막 인사를 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느라 정신없는데 그 말갛게 빛나던 비구니 스님이 내 옆으로 오시더니 등 뒤를 쓰담쓰담해주셨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뭔가 울컥 쏟아질 것 같이 감정이 차오르는데 여기서 울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아서 눈을 겨우 피하고 스님에게 궁금했던 그 말이 결국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 스님, 혹시 화장품 뭐 쓰세요?"
나는 내가 이 질문을 해도 되나 말을 하면서도 의심했는데 스님은 생각보다 당황하시지 않고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긋히 바라보셨다.
'앗, 민망해'
잠시동안의 침묵이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워서 "스님 피부가 너무 좋아 보여서요"
스님은 뭔가 내 마음까지 다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 네 안의 화를 잘 다스려봐."
그게 나의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왜 대부분의 스님과 수녀님들이 피부가 좋은 건지. 대체적으로 마음이 편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화장끼 전혀 없고 잿빛의 옷차림에서도 화려하게 빛이 나는 수녀님과 스님들을 가까이서 보며 저렇게 환한 얼굴을 갖고 싶다는 엉뚱한 질문이 그때 나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를 바꾸기 시작하다.
그때부터 점점 진한 화장과 화려한 옷들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는 강해 보이고 싶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진한 화장은 나를 위한 변장술과도 같았다. 뭔가 무기를 장착해야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서 기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멋의 기준도 성공의 기준도 점점 달라져갔다. 내 관심사와 생각이 달라지니 주변에 어울리는 사람들도 달라져 갔다. 더 이상 나를 해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루 한 갑씩 피던 담배도 하루아침에 끊고, 클럽 가고 술 마시며 파티를 하던 친구들과도 멀어지면서 더 이상 다음 날 없이 술에 취해 사는 날들도 줄어들었다. 나를 위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며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마음도 편안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취업 준비
국제기구 입사를 위해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항상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싶었고 그 일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나아지는 삶에서 나 또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시민 단체에서 활동가 생활을 하고 국제기구 산하 기관 등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내가 갖고 있는 기질이나 성격이 현장에서 발휘될 때마다 효능감도 느끼고 자신감도 올라갔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서 활동가 생활들을 볼 때마다 일에 대한 만족도가 행복은 비례하지 않았고 일과 삶의 불균형도 컸고 모순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던 시기였지만 자신이 없었고 확신이 없었다.
"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뭐지?"
" 내가 잘하는 일은 뭐지?"
" 내가 행복한 일은 뭐지?"
"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지?"
먹고사는 것이 중요해서 일을 하지만 먹고사는 것만 하기 위해 일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시절이었지만 고민만 하다가는 시간만 갈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행복한 일을 바로 시작했다.
나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잘하고 사람 사이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도 능숙하다. 무엇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재빠르게 행동하고 시작하는 추진력이 빠르고 문제 해결 능력과 순발력이 좋아서 단기 프로젝트에 탁월하다.
주변의 예술가 친구들과 기획자들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몇 년간 다양한 크고 작은 이벤트를 기획하고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프로젝트가 끝난 후 바로바로 느낄 수 있는 성취감과 피드백으로 내적보상에 취해 국제기구 입사 꿈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박근혜 정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날, 깨달았다. 내가 세상을 한쪽 눈으로만 보고 있었구나. 내가 보는 세상은 반쪽 짜리 세상이었구나.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 내가 관계 맺고 있던 대 부분의 사람들은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 안에 갇혀 있었는지. 믿고 있던 게 완전히 무너졌고 허탈함이 너무나도 컸다. 지금은 부끄럽지만 그 당시 다른 대선 후보자의 캠프에서 청년 대표 활동을 하며 선거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던 나의 청년 시절, 정치에 정도 모르고 살다가 정치에 살짝 발 담그고 정치를 알았다고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더 이상 나랑 정치는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미디어를 다 차단하며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은 망했으니 대한민국에서 세금 내며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조용히 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때가 내 삶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시스템 안에서 잘 사는 삶’이 아닌,
시스템으로부터 조금씩 물러나는 삶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 서른 살, 안식년을 갖다.
도시에서 사는 삶이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가까워질수록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주변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작아졌고, 부모님 앞에서는 그럴싸한 직장 하나 없이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남들 자식처럼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괜히 더 못난 자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불안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 나는 매일 새벽 성당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혼자 기도하고, 기도를 마치면 조용히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조금씩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처음으로 성당에서 하는 다양한 봉사 활동도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올해만큼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시간이 아니라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을 살아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나를 볶아 채지 않기로 마음먹고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시끄러운 세상 소리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 도와주세요, ~해주세요'가 아닌 평화의 기도와 당신 뜻대로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바꾸고 싶었던 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대하는 나의 자세였다.
그리고 내가 나를 도구로 써달라는 기도를 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누군가 내가 상담 공부를 할 수있게 수업료를 기꺼이 내주시는 분이 나타나고 감사하게 나는 1년간 상담 공부를 하면서 생명의 전화 자원 봉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봉사를 통해 잉여로운 시간이었지만 내 자신이 잉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의 존재 가치를 조금은 빛나게 하는듯 했다. 그 때 부터 내 안에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안식년, 자발적 백수 1년.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고 해서 불안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은 더 선명해졌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하루,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없는 시간은 생각보다 큰 소음을 냈다.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 계산은 멈추지 않았다.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비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소비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걸까.
사람들을 만나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또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닌다. 그 모든 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돈이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무료로 머물 수 있는 공간도, 돈을 쓰지 않아도 가능한 시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소비가 당연한 사회 안에서 아무 의심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나만의 작은 실험을 조용히 시작해 보기로 했다.
공원이나 고궁, 도서관, 박물관과 미술관처럼 돈을 쓰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공간들이 있었다.
텀블러에 물을 담아 나가고, 도시락을 챙겨 그늘진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소비하지 않아도 하루는 충분히 흘러갔고, 돈을 쓰지 않아도 마음은 생각보다 덜 불안했다.
카페에 들어가지 않아도 대화는 가능했고, 무언가를 사지 않아도 함께 머무는 시간은 만들어졌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라, 돈을 쓰지 않는 관계와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더 불안해졌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쫓아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그 속도를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나 혼자 느릿느릿 걸어가는 세상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 같은 온도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안식년 그 이후,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새로운 해에는 조금 다른 모드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난 1년은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지만, 시스템에서 조금씩 멀어져도 생각보다 괜찮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을 남겨주었다. 서른이 다가올 때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막상 서른한 살이 되자 이왕 늦은 거라면 조금 더 늦어진다고 무엇이 크게 달라질까 싶은 묘한 담담함이 생겼다.
불안과 두려움과 맞서 버텨온 시간들이 나를 약하게 만든 게 아니라 오히려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믿음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큰 실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돈을 쓰지 않고 세계 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는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미래가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당시 남자친구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앞날은 아직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그림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안정적이지만 너무 익숙한 경로, 질문 없이 흘러가게 될 것 같은 삶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떠났다. 더 자유롭고 싶어서. 내가 자유로웠던 그곳으로.
모든 소유물을 정리하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곳으로 떠나다.
돌아올 기약이 없었기에 모든 소유물을 정리하기 위해 플리마켓을 열었다. 배낭 하나에 꼭 필요한 필수품만 챙겨 떠날 여행이었기에 집 안에 가득 쌓여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옷, 가방, 구두, 액세서리들까지 정리하다 보니 몇 보따리가 쌓였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물건의 형태로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해외로 떠날 때 25킬로가 넘는 캐리어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많은 짐들이 이제 배낭 하나로 채워진다는 사실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이 물건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기억은 남기되 물건은 떠나보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좋은 주인을 만나 다시 잘 쓰이기를, 그 정도의 바람이면 충분했다.
지난 10년 사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짐도, 마음도,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플리마켓으로 번 돈으로 하와이행 비행기 티켓을 사고, 약간의 비상금만 챙겼다.
그리고 1년 동안 하와이와 남미를 오가며 살아보겠다는 꿈을 나 혼자 조심스럽게 세우기 시작했다.
꿈이 현실에 부딪힌 날
우프를 알게 된 뒤 나는 하와이에 가서 우프 여행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보겠다는 꿈을 품고 떠났다.
소비하지 않고, 일하고, 머물며 살아보는 삶.
그때의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하와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꿈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에 부딪혔다.
이민국 직원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여행의 목적과 내 신분을 계속해서 물었다.
얼마나 머무를 건지, 어디에서 지낼 건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는 있는지, 나는 그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오랜 비행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시차도 달라져서 피곤해서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데 긴장해서 버벅거리기까지 하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민국에서 “우프를 하러 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질문이 끝난 뒤였다.
거기에 자유로워 보이는 동양인 싱글 여자가 혼자 하와이에 입국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눈에는 이미 의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몇 년 전, 하와이에 교환학생으로 학생 비자로 입국했을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친구를 만나러 관광비자로 왔을 때도 단 한 번의 제지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고. 시스템은 늘 같은 기준으로 작동할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자유에 대한 믿음이었고 동시에 나의 순진함이었다.
나는 불법을 저지를 의도가 없었고 숨길 것도 없었다.
그저 돈을 덜 쓰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의도가 아니라 의심 가능성을 보았고, 나는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내가 하려던 삶은 관광도, 유학도, 취업도 아닌 어딘가 애매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돈을 소비하지 않고 미국 와서 체류한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법체류자와 다름없는 삶이었다.
질문은 반복되었고 분위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10시간의 인터뷰 끝에 결국 나는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날 나는 하와이에 발도 제대로 디뎌보지 못한 채 강제추방 결정이 내려졌고, 공항을 나서기는커녕
수갑을 낀 채로 구치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는 불법 체류자가 되어버렸다.
천국 같았던 하와이가 지옥이 되다.
구치소에서는 수치스러운 알몸 수사와 영화에서 보던 주황색 죄수복, 축축한 속옷을 입은 채 냄새나는 변기와 차가운 철제 침대가 함께 있는 1인실 독방에 갇혀 언제 나갈지도 모른 채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곳에는 낮과 밤의 구분도, 내일에 대한 예고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하나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나는 다시 세상에서 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한 인간이 아니라 번호와 기록,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공간.
존엄은 설명되지 않았고,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철컹철컹 열쇠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가 품고 있던 ‘평화로운 여행자의 꿈’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시스템 앞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작은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다시 한국, 그리고 세월호 참사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내 안에 쌓인 분노와 트라우마가 나를 안에서부터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동굴처럼 닫힌 방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선택으로 제주도 도보 여행을 떠났다.
한 달 동안 올레길을 걸었다. 아침에는 발이 먼저 나갔고, 생각은 한참 뒤에 따라왔다.
걷는 동안에는 과거도, 계획도 잠시 침묵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멀리만 보려고 했구나.
멀리 떠나야만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바깥의 세계에 답이 있을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오래 방치해 두었던 내 호흡과 내 발걸음이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제주도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볼 수 있겠다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오던 날,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에서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진도로 갔다. 사람들의 울음과 고함,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미디어에서 보던 장면과 현장은 전혀 달랐다. 외치고 싶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소리 없는 외침뿐이었다.
2014년, 나와 이 나라가 동시에 무너진 해
나 개인의 삶이 바닥으로 꺼진 해이자 이 나라의 신뢰가 산산이 부서진 해였다.
하와이 공항에서 강제추방을 당하던 그날, 나는 더 이상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의심 가득한 눈빛 앞에서 내 의도와 삶의 맥락은 한 문장으로도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여행자도, 범죄자도 아닌 애매한 존재가 되었고 그 애매함은 결국 구치소라는 가장 극단적인 공간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알몸 수사, 주황색 죄수복, 축축한 속옷, 변기와 침대가 붙어 있는 1인실 독방.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한 개인을 얼마나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몸으로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분노와 수치심,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안에서부터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제주 올레길을 걷고 겨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힘을 얻었을 무렵,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그날,
나는 또다시 설명되지 않는 세계 앞에 서 있었다.
뉴스는 구조 중이라고 했고 미디어는 곧 모두가 돌아올 것처럼 말했지만 현장은 전혀 달랐다.
진도에서 내가 본 것은 질서도, 책임도, 진실도 아닌 혼란과 침묵, 그리고 방치였다.
외치고 싶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와이 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개인의 목소리는 시스템 앞에서 무력했다.
그때 깨달았다.
2014년의 절망은 내 개인의 실패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해의 나는 강제추방당한 개인이었고
이 나라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국가였다.
나는 이유 없이 의심받았고
아이들은 이유 없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미디어는 사실보다 빠르게 말을 만들었고
진실은 늘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2014년은 ‘믿어도 되는 것’이
하나씩 무너져 내린 해였다.
국경, 국가, 미디어, 시스템.
그 모든 것 앞에서
개인은 얼마나 작고 취약한 존재인지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 해 이후
나는 더 이상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만
안전해지고 싶지 않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의 작은 혁명기 2탄이 이어집니다.
현재는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글을 잘 쓰려고 하면 자꾸 자기 검열을 하면서 깊어지고 무거워지는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떠한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 가치관이
삶을 구성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구조에 대한 저 스스로 이해가 먼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필터링 없이 써 내려간 글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해방하고 저를 보듬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다시 천천히 이 글들을 재 배치 하고 다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힘을 서서히 가질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한 발짝 떨어져서 저를 바라보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