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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zMe Jan 02. 2021

Boy Hood

동굴 들어가 보기

나는 도피성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주로 내 주변인 중에서도 나와 밀접한 사람들은 나를 향해

'보기보다 멘탈 강하네?'라고 간혹 이야기해주곤 한다.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도 분명 있겠으나, 내가 생각해도 내 멘탈이 강한가? 싶상황 있긴 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사실 내공이 강해서 힘든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적당히 도망치는 것을 잘했을 뿐이다. 도망쳐서 단지 그 시기를 어떻게 모면 또 모면해온 것일 뿐이다.


자주 괜찮아, 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정말 괜찮다고 세뇌를 시켰던가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흔히 말하는 얕은 힘듦 들이었다.

정작 힘든 것은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버릇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 버릇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 말해봤자 주변의 도움이나 조언은 내게 소용없었고, 무엇보다 내 내면에서 먼저 해결이 안 되었으므로 소용이 없다고 느낌.  

둘째, 말해봤자 해결은 안 되고 상대만 되려 더 무겁게 짐 지워버린 느낌. (따라서 일종의 민폐를 끼쳤다는 자책이 더 보태져 나만 더 힘들어짐)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봐도 늘 두려운 일이다.  

얼마나 두려운 지 모른다.

그 두려움을 버텨내기 위해 어느 정도는 단단히 각오도 해보지만 터무니없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제아무리 주먹을 꼭 쥐고 이를 악 문 각오라 할지라도, 그렇게 무장된 성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거대한 쓰나미처럼 나를 허물곤 했다.

아팠었고, 허우적댔고, 방황했고, 흙탕물로 온통 뒤덮인 채, 왜?라는 질문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도망치기 급급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구도 나의 그 아픈 시기를 눈치챌 수 없었겠지만.

아팠던 이후부터 그랬다.

그 이후부터 언제 생길지 모를, 마음이 다치진 않을까, 에 대한 공포가 내게 더욱 커졌다.

아파보면 강해지고 더 단단해질 줄 알았지만 그건 단지 이론이었다. 실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었다.

한 번 아파본 이후 내겐 그 아픔에 대한 공포가 처음보다 훨씬 더 증폭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그랬다.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 말이다.

언젠가부터 솟아오르는 감정들로부터 나는 자꾸 도망을 쳤다.

차라리 감정 문을 닫는 훈련을 더 오랜 시간 해왔다고 할까.



그런 식으로 지내오면서

나도 모르게 그런 나에게 익숙해졌나 보다.

내가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나 보다.



관조적 삶 속에도 기쁨이 있었고, 슬픔이 있어서 (관조적이었으므로 공감만 하면 되는 정도의 기쁨과 슬픔이니까) 거기 속고 지냈나 보다.

언젠가부터 일정한 그래프의 내 감정.

결코 요동치지 않는 내 감정.

그게 내 감정의 전부라고.

어쩌면 내공이 쌓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심지어 나 참 일관된 사람 아니냐고 자부하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까지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다가, 기승전결도 없는 저 영화 <보이 후드>를 보다가 어느 시점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더 정확히 말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곤 그런 나에게 화들짝 놀랐다.


"이 감정! 뭐지? 왜? 이 감정! 도대체 왜지?"


이 영화 앞에서 불쑥 울어버린다고?  

내가?

이렇게 관객이 많은데? 남 앞에서 운다고?

이게 나 맞을까? 내가 글쎄, 이럴 수 있는 거라고?

둘러보니 주변 사람들은 그저 덤덤히 영화를 보고 있었다.

때론 조금씩 웃기도 하면서?


나만 자꾸 스스로에게 당황하며, 설레고, 또 눈물을 감쪽같이 닦아내고 있었다.

왜일까, 왜.

영화 속 장면과 이 설렘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장면인데 왜.


집으로 돌아와 분석을 시작했다.

아까의 내 설렘에 대해

아까의 내 눈물에 대해.

도대체 내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뭘 그토록 따지고 드냐고, 어쩌면 조금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를 나의 이런 행동은, 나도 모르게 엄청난 화가 났던 어느 날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사람들에게 화를 아무리 내봤자,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던 그 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의 멘토로부터 감정을 분해시켜 보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때, 멘토의 도움으로 왜 화가 난 것인지 알고 나니, 원인을 해결할 수 있었고 이후, 비슷한 감정이 생길 때

굳이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아도 왜 화가 났는지를 먼저 분석하여 잘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과 부딪히면, 난 밤을 새워서라도 원인을 찾아놓아야만 안심이 되는 버릇이 생긴 것이었다.


답을 찾아야 두려움에서 해방되니까.

답을 찾아야 이 감정을 내가 다스릴 줄 알 거니까.


어떻게 보면 일종의 두려움을 이겨보려는 겁쟁이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마치 좀 전에 배를 밀고 바닥을 지나간 벌레가, 어디에 숨었는지 꼭 알아내어, 에프킬라를 뿌리고 또 뿌린 다음

벌레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할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살아갈 날들에 생겨날 더 많은 감정 폭풍을 이해하고 다스리기 위한 학습의 한 과정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게 나는 내 감정에 대한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영화와 연관 지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영화의 여러 장면을 되짚으며 거슬러 올라갔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난 결국 내 감정의 원인이 영화의 한 장면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일단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감정도 접어둬 보자.

다음 방법으로 나는,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영화 관람 후 내 무의식이 현재 내 혼란스러움의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추론이라고나 할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의식에 맡기니, 가장 먼저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보고 싶어 졌고, 모든 사진첩을 꺼내어 뒤적거리게 되었다.

다음으론 지금껏 받아온 숱한 편지가 들은 박스들을 꺼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무작정 해보았다.


찾다가 보니 생각나는 것이 더 있어 더 찾기도 하고, 찾다가 찾다가 아직 못 찾은 것도 있다.


내 인생의 부차적 산물들


한참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또 생각해보며 나를 분석했다.

난 왜 이 행동이 하고 싶었을까?

이 행동과, 영화 <보이 후드>와, 아까의 내 감정과의 연관성은 과연 무엇일까.

.

.

.


다행히도 결국 해답을 찾았다.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도피성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감정'이라는 것에 맞닥뜨리면 재빨리 나를 안전한 곳에 가두었다.

안에만 있어. 나오지 마, 다쳐

안에만 있어. 나오지 마, 다쳐

안에만 있어. 나오지 마, 다친다구.


그렇게 나는 감정적 문제에서 도망 다니고 있었으나 오늘의 해답인 바로 이것.

'기억으로부터도 도망 다니고 있었음'을 몰랐던 거다.

단지 감정만 누르고 살았다고 느꼈다.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지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난 참 비굴하게도 어느 때건 심지어 영화를 볼 때마저도 나를 방어했으니까.

영화를 보다가도 아플 수 있는 게 싫어서.

그런데 오늘 이 영화 앞에서는 어떻게 감정을 고스란히 내버려 두었던 거냐고?  


마치

영화가 아닌 듯 흘러가서.

영화 속 시절을 따라 너무도 유유히 흘러 흘러가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어떤 반전도 복선도 나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그렇게 풀고 영화를 따라 흘러 흘러갔나 보다.


나도 모르게.

반전에 대한 긴장도, 극적인 요소에 대한 긴장도 풀고.

늘 꼭 쥐고 있던 감정의 문고리마저 놓았나 보다.

흘러 흘러가다가 나의 과거들과도 여러 차례 오버랩이 되었었나 보다.

저렇게 소소한 흐름이  한 편의 영화가 된 것을 보며, 나의 흘러 흘러온 지난날도 영화처럼 떠올랐나 보다.


중간중간 어느 부분에선 과거의 나도 겪었을 법한 무언가가 있었기에 공감이 되었었나 보다.

가령,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두 사람이 걷는 장면에서.

내가 처음 새벽을 맞이했던 어느 날의 상큼하고도 차분한 새벽 향기가 기억났다거나.


아빠에게 동시에, 누나는 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생은 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며, 나도 저랬어, 라는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거나.


소소하게 공감할 것들이 많은 영화라, 꺼내보았자 아픈 기억이 아닌 공감 거리라, 서서히 서서히 나는 긴장을 풀어갔고, 그 틈을 타서, 가둬 두었던 기억들이, 선을 그어둔 지표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던가보다.  


어마어마하게 아팠던 기억이 아닌 소소한 일상들이 떠오르니, 나도 방어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히려 그래, 그래 맞아, 그랬어, 하며 나의 과거를 넘나들다가 그만, 잊고 있던 나의 어느 시절마저 넘나들게 되고.

무방비 상태로 당시의 감정들을 느끼게 되고 만 것이었다.


설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감정.

설렘을 오래 잊고 지냈다.

잊고 지냈다는 말보다는, 외면하고 지냈다는 말이 더 맞겠지.

방어하고 지냈다는 말이 맞겠지.


내가 알게 된 설렘이라는 감정의 끝은 지독하게도 엄청난 아픔이었기에.

난 두 번 다시는 설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감정을 가두었던 건데.


오늘 내가 눈물이 난 까닭은,

가장 핵심적 원인은.

내가 아주 오래 전의 나로 돌아갔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다쳐, 방어기제라는 것이 생기기 이전의.

한 번도 상처가 나지 않았던 사춘기 때의 싱싱했던 감정, 나.

그때의 나를 찾은 감격이었던 거다.


마음의 형태를 갖추기 전 시절로 돌아가

그때 느끼던 감정들을

마치 처음 느끼듯 그대로 느끼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분석은 일단락되었다.

모호한 무형이지만 내 안에서는 확연한 모양을 갖춘 채 정돈되었다.


앞을 보니 설렜던 나의 과거들이, 박스 속에 또는 종이 백 속에 또는 비닐 속에 한 가득 들어있었다.

내 방어기제는, 과거의 진실들을 와해시켜 나에게 없었던 일이라며 고스란히 기억을 지워놓았던 거구나.

오랜 시간 전혀 기억하지 않았던 나의 옛 추억들이 물꼬를 트니, 감당 못할 만큼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편지를 한 장 한 장 뒤적이면서

나는 인정했다.

솔직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멀리 도망이나 다니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내 삶을 내가 맞닥뜨리기보다는 회피하고 부인하고 억누르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순수했던 날 이후,

줄곧 억눌림을 당해버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어 배회하고만 있던 내 감정이

마침내 착륙할 공간과 만난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울컥 울어버렸나.

당시 몹시도 아팠었을 감정이,

도피성 방어기제로 인해 묵인당하고 억눌림 당해,

안 아픈 척 남의 일인 양 멀찌감치 참고 기다다가,

이제야 저를 봐주니, 이 때다 하고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다.


하나씩 하나씩 꺼내 보는 모든 것은,

내가 살아온 과거고,

비록 아파도 나의 아름다운 추억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전부 다 나의 것들이었다.


나의 것.

나의 감정.

과거에 내가 맞닥뜨려야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맞닥뜨려야 할.


고맙다, 이 영화.

나답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용기 내어 나답게 살고 있다 자부했는데

정작 내 감정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용기 없었고, 도망자였어.


솔직하게 대하지 못한 나의 감정이 나와 재회할 수 있도록 나를 오픈시켜준 영화.

이 영화에게 고맙다.


그리고 하나 더.

소소한 일상으로 엮어버린 이 영화는, 우리의 일상 역시 영화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이, 아니, 나의 일상이 영화가 되려면, 내 인생이 조금은 더 아름다워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관람할, 영화로서의 내 삶이 아름다워지려면,

뭔가 애써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내 감정에 좀 더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쁘다가, 아파했다가.

좀 더 솔직히 반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마치 '나 연기하네.' 하는 것처럼 감정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말이지.


내 과거들을 다시 꺼내어

아팠어도 아름다웠어,라고 위로해본다.

방치해두었던 기억을 보듬어줘 본다.

잊지 말자.

버리지 말자.

그래 봤자 다 내 인생이었던 건데.


앞으로 다가올 많은 일들도 이젠 숨지 않고 맞닥뜨려야겠다는 다짐마저 해본다.

다 내 인생이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 역시도 내 인생.


나 이쯤 깨달았으니, 비록 겁쟁이인 인생이지만 엮이고 싶은 아름다운 인생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재미있게 엮여볼까?

감정이 다치지 않도록, 조금만 가까워질 듯하면 '저리 가!', '다가오지 마.' 하던 나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 함께

엮이고 또 엮여

많고 많은 우리가 되어

한 편의 영화처럼

아름답게 살아보는 것.

멋지게 도전해볼 수 있을까?


서로의 인생

스스로에게 솔직한가

점검도 해주면서

토닥토닥도 해주면서

한 번 그래 주자.



영화가 주는 위로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으로

서로서로 위로해줘 보자.


부정적인 일만 생기면, 그 일로부터 도망가기 바쁜 감정.

이 일은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닐 거야. 남의 일이야.

잊자, 잊자.

잊자, 잊자.

외면하면 그만이야.

멀찌감치 도망가며,

다른 사람을 향해 '나! 괜찮아!'라고 외쳤던 나에게


아니.

너 절대 괜찮지 않아.

라고, 말해 줄 수 있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조금은 두려워해 보며

조금은 기대해 보며

<보이 후드>로 영향받은 나의 생각을 마친다.



2014.10.29. 수요일 새벽

영화 속 젊은 남자의 인생을 함께 하며

내 감정을 되찾은 날.


영화 <보이 후드> 스틸컷 _ 이미지 출처: 구글

author, SuJi 2021 0102

- 어딘가의 내 기록에서 이 자리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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