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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zMe Jan 15. 2021

속천 갈매기에게

핸드폰을 두고 나온 날  

속천 갈매기에게            


이렇든 저렇든 어찌 되었든

폰을 보지 않아도 된다.


폰 하나 없을 뿐인데

삶에 생기가 돈다.


보고 싶음을

이야기하고 싶음을

이 상황, 당장 공유하고 싶음을


잠시


간직해도 된다.


간직.

간직이란 단어가 이토록 아름다운 단어였구나,


깨달으며

바닷가에 앉았다.



하늘.

하늘을 가린 이파리.

이파리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이 내게 생겼네.



신호등이 없는 너의 길, 하늘.

거침없이 미끄러지며 노는 갈매기들을 보다가


보다가 보다가.


그래.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난 너에게 감히 범접할 수 없구나.


너네는 신호등이 없어서

잠시 멈추지 않아도 되는구나.



신호등을 만들 수가 없었던 거지.



너희는 비록

냉장고마저 만들지 못했지만


그래서 양식을 저장할 수 없고

배가 고프면 그때마다 먹이를 찾아다녀야 하지만,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만이

너의 중요한 한 가지라면


오직 그 한 가지가 너의 고민이라는

내 추측이 맞다면


본질에 충실한 너의 행복 앞에

군더더기에 충실한 내가

어떻게 감히 범접할 수 있겠니.



너에게도 다른 고민이 있니?

있다면

과연 이런 것일까?



완벽한 영상편집?

미묘하게 재차 확인해보는 믹싱 상태?

다음 시나리오의 완성?

BGM작업을 위한 일정?


계획된 약속들?

오늘까지 보내주기로 한 이메일?

사무실 월세?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


외우지 못한 폰번호?

임박한 약속시간에, 황색 등으로 바뀌는 중인 신호등의 갈등?

진심은 버려두고 의무감만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 큰 모임?

예의상 하는 인사?


쌓여있는 이삿짐?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이

가장 험난한 고민이 될지라도


너처럼

그렇게 '단 하나'가 삶의 목적이 된다면

나도 이 무거운 군더더기의 알을 겁 없이 뚫고 나가고 싶다.



그럼

가벼워지겠지.

너처럼 날아버릴지도 몰라.



너를 폄하했다면 미안해.

내가 보는 넌

단 하나만 고민일 거 같아서 그랬어.



너도 벌거벗은 너의 몸을 신경 쓰고

선크림을 바르고 날아다니는 거였다면

내겐 사과할 의향이 충분히 있다는 걸 기억해줘.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갈매기에게.

폰이 없었던 자유로운 날.


 2014년 8월 6일의


author, SuJi 20210115 _ 과거로부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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