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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Nov 02. 2018

리뷰) 미스터 선샤인

제 온 생을 흔드시는 이유가 진정 있으십니까.

내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기도하지 않는 자의 기도도 들으십니까. 제 모든 걸음에 함께 계셨습니까. 제 온 생을 이렇게 흔드시는 이유가... 진정 있으신 겁니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 초췌한 얼굴의 배우 이병헌. 마른 입술, 패인 눈. 잔잔하게 고요하게 낮고 허무한 목소리로 펼쳐지는 내레이션. 베이지 레이스 드레스와 초록 리본 달린 서양 모자를 쓴 여인의 환영 장면. 허공에 선을 긋듯, 초점은 여인에게로. 책을 들고 대학가를 활보하며 활기차게 웃는 여인. 이곳 아메리카에서 책을 읽고 말을 타고 집을 짓고 따뜻한 밥을 나누어 먹고 싶었을, 이민자 '유진'의 강렬한 욕망을 연기하는 씬.



허무와 욕망, 정 반대의 감정을 한번에 담은 배우의 얼굴과 눈빛. 훌륭했다. 모든 인간의 허무의 끝에 강렬한 욕망이 있음을, 그 반대의 경우도 그러함을, 작가와 배우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위 내레이션 대사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잘 드러낸다. 주인공 유진이 신께 묻는다. 제 온 생을 흔드시는 이유가 진정 있으신 겁니까.


1. 기도하지 않는 자, 신의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방인. 나의 하느님, 이라 감히 부를 수 없는 이질감과 물러섬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2. 하지만 기도하고 있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의 기도도 들으십니까." 이방인은 기도하고 있다. 신을 믿고 있음을, 인간으로 숨쉬는 모든 순간에 신이 함께 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3. "제 모든 걸음에 함께 계셨습니까." 확인하는 이야기다. 신은 계셨고 신을 믿었고 그렇기에 험난하고 허무했던 매순간에도 버텼다는 이야기다. 신의 아들이 아닌 자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영혼의 독백이다.


4. 그리고 묻는다. "제 온 생을 이리 흔드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인의 등장. 떨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숨쉬는 모든 순간, 그 여인과의 평온함을 꿈꾼 사내의 절규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전과 달라진 자신에게, 그런 운명을 엮은 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답을, 신께 재차 확인하고 있다.


이방인의 물음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은, 김은숙이 쓰고 이응복이 그린 유진은, 성숙한 어른이었다. 나라 고향 부모 가족이 없는 절대고독자인 유진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홀로 생존하는 법을, 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법을 터득한 성숙한 인격체다.


타고난 영특함은 냉정함과 치밀함으로 유진의 내외면을 완성시켰다. 생과 사의 경계선이 잦은 험한 인생 경로 탓에, 그의 말과 얼굴은 늘 무겁고 진중했고 머릿속은 논리적이고 명쾌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런 유진의 사고방식과 모습을 잘 그려낸, 명장면 명대사들이었다.


신의 응답은 안내자

이어지는 장면은 안창호와의 짧은 만남이다. 나의 길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그의 침묵을 깨는 것은 바로 도산이다.


양장을 한 도산에게 길을 안내하는 유진. 유진은 역사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복선이다. 그리고 의병이며 의병을 키워낼 그의 여인에게도, 그는 생명을 지속시키게 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신의 응답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불멸의 사랑에 대한 신의 잔인한 응답이다.


억압과 낭만의 시대를 그린 수작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의 역사를 담은 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기본 코드는 '억압의 시대에 드러난 낭만'이다. 마치 긴 역사 속에 아주 짧은, 꿈처럼 어이없고 속절없는 시절에나 나올 법한 강렬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주 요상한 이 시기에 다시 없이 장렬하게 대의를 위해 죽거나 염치와 도덕을 상실한 채 인간상실을 제대로 보여준 군상들을 묘하게 대조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것. <미스터 선샤인>도 바로 그런 뼈대로 이뤄져 있다.


이야기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사랑의 본질을 잘 그려, 배우의 연기몰입을 이끌어낸,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내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내 남은 생을 다 쓰겠습니다. 그 모든 걸음을 오직 헛된 희망에 의지하였으니, 오직 살아만 있게 하십시오. 그 이유 하나면 저는 나는듯이 가겠습니다. <미스터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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