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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Jun 04. 2019

리뷰) 봄밤

"No Direction" 사랑도 인생도 흘러가는 노래처럼

<봄밤>, 이 드라마의 절반 이상은 음악이다. 불협한 듯 감정선 사이로 툭툭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에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고 할까. 어떤 이들은 음악이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고도 하는데, 모호함을 주면서도 어딘가 모험가적인 기세를 풍기는 그 느낌이 나는 좋다.


이 음악의 제목은 'No Direction'. 인생이란 벚꽃 흐드러진 봄밤 술 한 잔에 초점 없이 흔들리는 시선처럼 일정한 방향도 어떠한 계획도 없이 흘러가는 어떤 것인가 싶게 드라마는 흘러간다. 계절이 오듯 당신이 왔고 바람이 불어 모든 것은 흔들린다. 눈을 떠보면, 그 따스한 바람을 타고 '뜻밖의 당신'이 서 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이야기에 더 얼마나 설명이 필요할까. 이 드라마는 솔직히, 뚜렷한 줄거리나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남녀가 우연히 만나 호감을 느끼고 마주침을 거듭하면서 혼란을 느끼면서도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이야기다.


사랑에 빠진 이가 두려운 것은 제삼자들의 반응이 아니다. '나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힘들까.' 그것 때문에 망설이는 남자 주인공 지호(정해인)의 모습이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힘이다. 그는 자꾸만 물러서며, 내적인 욕망을 더욱 폭발적으로 쌓아간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그녀를 놓아줄 수 없게 된다.


지호의 생각대로 이들의 결합을 힘들게 하는 요인은 주로 정인에게 있다. 정인(한지민)에게는 정혼한 것과 같은 오래된 연인이 있다. 사리가 분명한 정인에게는 사랑 없는 결혼은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불꽃이 사그라들었다는 이유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 쉽게 용납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딸 혼사를 사다리 타기의 정점이라고 여기는 아버지의 속물근성에 대한 반발심, 조건으로 맺어진 언니의 결혼생활의 참담함, 사라진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아빠의 친구로 만난 정인에게 끌려 '엄마'라 부르는 지호 아들에 대한 애틋함. 이 복잡한 상황과 감정들이 정인을 지호에게 이끄는 추동력이 되고 있다. 그래서 남은 이야기는 정인이 지호를 향해 가는 그 고통스러운 한 걸음 한 걸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눈이 맞았다, 라는 것. 두 남녀가 이끌린다는 것.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로에 대해 내밀히 털어놓은 적이 없는 두 남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서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갖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이 태어나고 자라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다져진 '에고'라는 것의 어느 부분이 서로 닮아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안의 빈 곳을 이해하고 말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끌린다'라고 표현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드라마의 두 주인공 정인과 지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보호벽이 높은 반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것을 향해 가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 그 둘은 닮아 있다. 닮아서 잘 알 것 같고, 닮았으니 서로를 위해 물러서 주고 싶기도 할 것이다.


혹자는 바람난 정인의 이기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냐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봄밤처럼 찾아든 짧고 강렬하고 모호한 어떤 감정적 순간, 그것이 한 여인의 삶의 방향을 틀고 모험을 걸게 하며 많은 것을 감당하게 한다는 그런 소품 같은 이야기일 뿐.


<아줌마>, <하얀 거탑>, <아내의 자격>, <밀회>,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등 밀도 높은 감정을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안판석 감독. 1961년생인 안 감독은 '봄밤'에 꽂혔다.


특별할 것 없는 두 남녀 이야기에 자꾸 눈이 가는 건 두 배우의 진실한 눈빛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불쑥불쑥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줄거리대사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일상의 그림이 펼쳐질 때 이런 고급진 음악이 흘러나와 그 상황을 그 장면을 페이드 아웃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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