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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남동 심리카페 Oct 24. 2024

연남동에 심리카페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

이제 제 심리카페를 철거하고 폐업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네요. 철거 업체와 잡은 철거 일정이 10월 30일이니까요. 하루면 철거가 된다는 말을 듣고 '하루면'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곤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과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오랜 시간이라는 것은 카페 인테리어 공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만의 방식과 모습을 가지고 운영을 했던 '연남동 심리카페'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시간을 말합니다. 카페를 정리하면서 8년의 시간 동안 왜 그렇게 카페를 유지하려고 했는지, 그 비하인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야기의 시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갖게 된 생각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제가 가졌던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죠. 



어릴 때, 다르게 자랄 수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사셨을 텐데



말만 놓고 보면, 불행하셨거나 잘못 사셨던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으세요. 저의 아버지는 약대 교수셨어요. 할아버지도 약대 교수셨죠. 그리고 할머니는 화가셨답니다. 할머니 시대에 여성이 화가로 활동을 하다는 것은 지금보다는 아주 많이 힘들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해요. 


 

엘리트의 좋은 집안에서 아버지는 태어나셨던 거이였죠. 표현하기가 많이 조심스러운데, 필요한 만큼의 공감과 교감, 이해와 보살핌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성인 아이'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셨던 것 같아요. 성인의 삶을 살지만, 아이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성인 아이의 삶을 사셨겠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여러 분들이 들려주시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에서였습니다. 너무도 성인의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장례를 치르면서 그 모습 안에 있는 진짜 어떤 감정과 마음으로 사셨을지가 그려졌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들이 아버지가 보내야 했던 시간들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져 미안했었습니다. 전 아버지를 너무 어른으로만 생각을 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원망도 하고, 그래서 더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드리지 못했었죠. 



저의 아버지는 제가 제대하고 일주일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입대를 하기 얼마 전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잠실에 있는 호텔에 가족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얘기를 해주셨죠. 식당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을 전달받는 것만 같았어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식당의 분위기만큼이나 어려웠었죠. 



저는 제대하고 군복을 입은 상태로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고, 아버지는 군대에서 무사히 제대해서 돌아온 막내아들인 저를 보면 병실 침대에 누워있으신 상태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맞아주셨죠. 나중에 어머니에게 얘기를 듣자니, 계속 통증으로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그렇게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었다고요. 



아버지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셨던 순간은 찰나였고, 돌아가시기 일주일 동안은 계속 아파하시고 고통받고 있으신 모습을 보아야 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저에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파하시고 고통받고 있으신 표정이어서 더 장례식 때 아버지 지인 분들로부터 듣게 되었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에 더 마음이 뭉클해졌던 것 같네요. 



저희 가족은 슬픔을 애도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애도가 있어야 했던 자리에 책임감과 일상으로의 적응이 자리 잡았죠. 누르고 숨기고 언급하지 않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조심할 뿐이었죠. 슬픈지도 몰랐었어요. 방 안에 있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 너무도 힘들어지곤 했었죠. 



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없었지만, 대신 아버지와 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저는 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복학해서 편입 시험 준비를 했었죠. 말 그대로 '어릴 때 다르게 자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현실에서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삶을 살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심리학과가 아닌 아동학과로 편입해서 대학원을 아동 상담으로 가게 되었죠. 심리학과는 전체 연령에 관해 다루는 것이었고, 아동학과 안에 있는 아동상담은 제가 원했던 '어릴 때 다르게'를 더 다루는 것으로 느껴졌었으니까요. 






유치원과 놀이치료 센터에서 일하고 바뀐 생각


'어릴 때 다르게 자랄 수 있다면, 다른 삶을 살 텐데'라는 생각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유치원과 놀이치료 센터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유치원을 운영해 볼 기회가 생긴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망해가고 있는 유치원이라는 현실적인 상황도 같이 가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96명 정원에 40명 정도의 원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40명 중 7세 반 아이들이 20명이 넘어갔었습니다. 이 말인즉은, 7세 반 아이들이 졸업하고 나가면 원에는 열몇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때는 젊었고, '어릴 때 다르게 자랄 수 있게' 해주는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것에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라면 그런 무모하고 고생길을 가게 될 것을 하지 않았겠죠. 아닌가, 원래 저의 성격이 좀 현실적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감사하게도, 그리고 운이 좋게도 2년 만에 96명 정원을 다 채우고, 3년 만에 줄을 서는 유치원이 되었습니다. 대학원 전공을 살려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들을 무료로 제공해 드렸었죠.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2~3개월에 한 번씩 신청을 받아 그림검사들을 해드리고, MBTI 검사와 그에 따른 해석과 설명을 해드렸었습니다. 그리고 10명 정도의 학부모님의 신청을 받아 3개월 간 매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양육코칭을 해드렸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유치원이라는 곳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유치원이라는 곳을 아동상담을 전공한 사람이 마음을 먹고 심리상담적 접근을 쏟아부으면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한 가족의 민낯이죠. 학실히 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아교육을 전공하신 분들이 보는 것과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동상담을 전공한 제가 보는 것이 다르더군요. 볼 수 있는 것도 다르고요.



아이가 그린 그림검사 자료, 부모님이 그린 그림검사 자료, 양육코칭을 하면서 매주 들려주시는 한 주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고, 아이들이 어떤 아이를 좋아하고 어떤 아이를 싫어하는지를 통해 파악하는 또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주 5일 아침에 등원해서 오후에 하원할 때까지 또래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수업시간과 놀이시간에 어떻게 있는지를 관찰해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아이를 통해 듣게 되는 부모님의 모습과 유치원 등하원 시에 보여주는 모습이나 평소 담임선생님과 어떻게 지내시는지, 같은 반 다른 학부모님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유치원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놀이치료 센터에서 일할 기회들이 많이 생겼었습니다. 좋은 학교에서 아동상담을 전공하는 남자인데 유치원도 운영을 하고 있는 점이 새로 놀이치료 센터를 오픈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매력 있는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놀이치료 센터에서 부소장으로 일을 하기도 했었죠.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는 조건으로요. 



놀이치료 센터에서의 생활은 유치원과 달리 일주일에 한 번 아이를 보게 되는데, 깊이 있게 아이와 학부모에 대해 분석하고 파악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놀이치료 센터에서는 놀이치료 전용 상담실에서 1:1로 50분 정도의 놀이치료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하루 날을 잡아서 학부모님과도 1:1 상담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10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그리고 놀이치료 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다양한 가족, 다양한 부모, 다양한 아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보여주려고 하는 모습이 아닌, 민낯을요. 실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부적응적인 모습은 어떤 것까지 있을 수 있는지를요. 



잘 지내시는 보통의 가정들도 있지만, 겉으로만 잘 지내는 듯 보일 뿐 심각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부적응적인 가정들도 있었죠. 알코올 중독에 빠져 매일 술 냄새를 피우며 아이를 데리러 오시는 어머니, 폭력적인 아버지, 서로 병들게 만드는 부모님, 그런 부모님을 두고 또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불쌍한 모습으로 겪고 있는 아이. 다양한 민낯들을 보았죠. 



'어릴 때 다르게 자랄 수 있다면, 다른 삶을 살 텐데'라는 생각으로 아동 상담 쪽으로 왔는데, 10년의 시간을 아동 관련 시설에서 일하면서 갖게 되는 생각이 바뀌게 되더군요. 이렇게요.



애당초 맺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있고, 애당초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가 있다.



노력과 다짐으로 안 되는 현실 속 분들과 관계들을 보면, 그런 사람과 그런 관계를 두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노력하려고 하는 분에게 너무 먹먹해져서 어떤 말도 나오게 되지 않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유치원이라는 곳과 놀이치료 센터에서의 생활에 한계점을 느끼게 되더군요. 



이미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하게 가 안 되는 힘든 가정 안에서는 다르게 자라고 다른 삶을 산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점점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별 문제없고 잘 지내는 것이지 심리정서적으로 문제와 어려움을 많이 겪고 갖게 되는 삶이 안타까웠습니다. 



저의 생각은 '애당초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관계를 시작되지 않게 하자'로 바뀌어졌습니다. 물론 제가 이래라저래라 대신 판단과 결정, 선택을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판단으로 고통과 불행의 시간을 마인드로 풀어내가는 것으로 사는 분은 한 명이라도 구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고통받는 아이와 고통받는 어머님, 때로는 아버님을 볼 때면 너무도 뭉클해졌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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