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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Jul 01. 2023

뭐라도 쓰면 무엇이라도 될 것 같아

널 위해 숨 쉬고 있을게. #3

  울진과 봉화 장을 오가며 선질꾼이셨던 아버지는 어느 날, 집에 소년 한 명과 돌아왔다.  소년은 진주네 문간방에서 머무르며 아버지 선질꾼 일을 도왔다. 진주는 소년과 마주하기도 힘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봉화 장을 다녀온 날, 뒷정리를 소년과 함께 하게 됐다. 진주는 소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니?"

  "집은 어디야? 부모형제는?"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부끄러워서라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그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진주는 소년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아버지는 그런 과묵함을 칭찬했다. 벼랑길을 따라 지게를 지고 물건을 팔고 사서 돌아오는 일이 어린 소년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음에도 소년은 말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다.  


  진주네 가족은 어머니를 병환으로 떠나보내고 아버지와 큰 딸인 진주,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과 살고 있었다. 소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갑자기 나타난 객식구였지만 점점 식구가 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혼자 하시던 농사일이나 뱃일도 소년이 거들었다. 어느 순간, 소년이 아니라 진주네 식구 모두가 소년을 의지하게 되었다. 


  "진주야, 진주... 어딨나?"


  아버지와 봉화 장을 함께 다니던 이웃 아저씨가 진주를 찾았다. 부엌일을 하다 마당에 나가보니 소년이 아버지를 업고 들어왔다. 진주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업은 소년을 방으로 안내했다. 정신없이 깔아놓은 요 위에 아버지를 눕혔다.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재문이 아니었으면, 클 날 뻔했다. 재문이 고생 많았데이. 글고 아부지는 며칠 쉬문 괜찮을기다. 어데 우리가 이란 적이 한 두 번이가. 그이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간호를 잘해드리라. 글고 지금 약방에 가서 약부터 얼른 받아 오니라."


  아버지 옆에서 진주는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주 눈에는 아버지의 다친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일어서려는데 순간 휘청거렸다. 그 순간, 소년이 부축을 했고 소년은 진주의 손목을 힘주어 잡더니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약방에 다녀온다는 말 같았다.   


  아버지는 울진에서 봉화장을 오가는 열 두 고개 중 벼랑길에서 소금을 지게에 지고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게 됐다. 다리가 낫는 동안 아버지가 하시던 일은 모두 소년의 몫이 되었다.  진주는 소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이 봉화로 떠날 때면 진주는 밥을 하고 난 후 남아있는 누룽지를 모아 소년에게 건네곤 했다. 소년은 아버지를 대신해 십이령 길을 오가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라고 했지만 소년은 떠나지 않았다. 


  울진 흥부에서 출발해 쇠치재, 세고개재, 바릿재, 샛재, 너삼밭재, 저진터재, 새넓재, 큰넓재, 고채비재, 맷재, 배나들재, 노룻재를 넘어 소천을 오갔다. 소천장과 현동장, 봉화장과 춘양장을 오가며 흥부장이나 울진장에서 미역이나 소금, 생선을 지고 열두 고개를 넘었다. 다시 또 봉화의 춘양장과 소천장, 현동장과 봉화장에서 물건을 팔고 대마나 담배, 콩 등을 지고 울진의 흥부장, 죽변장, 울진장으로 돌아왔다. 


  고된 일이었지만 소년은 마치 처음부터 진주네 식구였던 것처럼 감내해 냈다. 진주는 피붙이도 아닌 사람들을 위해 혼자 애쓰는 소년이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했다. 가만히 있을 수만 없어 진주도 울진과 봉화 장을 따라 물건을 팔기로 했다. 


  예부터 십이령을 넘는 이 중에는 행상 아낙들도 있었다. 진주도 미역을 머리에 이고 행상아낙들을 따라나섰다. 십이령 고갯길은 생각보다 험하고, 위험했다. 길이 좁아 맨 몸으로 걷기도 힘든 데다 미역까지 머리에 이고 가다 보니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초행길이었던 진주에게는 버거운 길이었고, 결국 혼자 뒤처져버렸다. 도적이나 산짐승을 만나는 일들도 있다고 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아득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 발을 헛디디면서 길 아래로 미끄러졌다. 


"아~악! 사람 살려~"


  그 와중에 머리에 이고 있었던 미역을 잡겠다고 버둥거렸지만 놓치고 말았다. 이후부터 어둠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소년이 진주를 찾아내  지게에 지고 왔다고 한다. 이후부터였을까. 진주는 봉화로 떠난 소년이 울진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전날 밤부터 들뜬 기분으로 기다렸다. 도착시간이 마냥 더딘 날에는 동구 밖까지 나가 먼발치에서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곤 했다. 


  하루는 도착 시간이 됐는데도 소년이 나타나지 않았다. 진주는 소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십이령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갔다. 조금만 더 하면서 걸어온 길은 마을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나마 달빛과 별빛이 밝아 길은 어둡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라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나면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미역소금 어물지고 춘양전은 언제가노 
  대마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 평생을 넘던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 두 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를 찾아 눈길이 머무는 곳에 소년이 있었다. 


 "뭐야,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어?"


  이 노래는 아버지가 십이령을 넘나들며 부르는 노래였다. 보부상이었던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부르며 십이령을 오갔다고 했다. 진주는 소년 앞에 섰다. 하지만 소년은 진주 옆을 비켜 지나갔다.  

   " 저기...  "

  소년은 지게를 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야, 주재문! 너 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이야. 네 눈엔 나란 사람이 안 보여?"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화가 난 진주는 소년에게 돌을 던졌다. 그래도 소년은 제 갈길만 가고 있었다. 소년은 말을 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 ‘재문아’라고 부르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했다. 처음 불러본 이름이었는데, 정작 이름의 주인공은 남의 이름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진주의 심장은 고동쳤다. 


  소년의 지게 진 등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뒤늦게 집에 와보니 소년은 밥상을 치우려고 하고 있었다. 진주는 그 모습을 보고 밥상을 뺏어 들었다. 소년은 쉽게 밥상을 내어주지 않았다. 서로 힘을 겨루다 밥상이 쏟아졌다. 진주는 울면서 마당을 뛰쳐나갔다. 


------------->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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