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두 가지 스타일의 서핑이 존재한다. 서핑보드가 파도의 한 면을 타고 하늘과 맞닿은 파도 면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파도 면 제일 아래, 해수면에 닿은 부분까지 내려오고, 또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파도의 면을 위로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파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서핑을 하는 퍼포먼스 스타일의 서핑이 있다. 한편, 파도의 면에서는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지 않고, 서핑보드를 파도 면의 어느 한 군데에 고정시키듯 둔 채로, 서핑보드의 앞으로 걸어가 마치 차렷 자세를 하듯 파도 위에 서 있기도 며 서핑보드 위를 자유자재로 걸어 다니는 클래식 스타일의 서핑이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떤 스타일 서핑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처음에는 3미터는 넘는 크고 묵직한, 표면이 스펀지와 같이 부드러운 재질로 된 소프트탑 롱보드를 타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파도를 잡아 파도 위에서 안정적으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으면 최고이다.
파도를 잡는 횟수가 늘어나고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도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이제는 파도 위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빠른 속도로 파도 위를 전진하고 턴을 하며 파도 면을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싶으면 좀 더 날렵하거나, 길이가 짧은 보드를 타고 퍼포먼스 스타일 서핑을 하면 되고, 속도가 조금 느릴지언정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파도 위를 나아가고, 그와 같이 보장된 보드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보드 위를 춤추듯 걸어 다니고 싶으면 길고 넓은 보드를 타고 클래식 스타일의 서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파도를 잡아타는 횟수가 늘어나자, 나는 클래식 스타일 서핑보다는 빠르고 역동적인 퍼포먼스 스타일 서핑에 눈이 갔다. 그리고 내 키만 한 짧은 보드를 타고 자유롭게 바다 위를 날듯이 서핑하는 숏보더가 되는 것을 로망으로 품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 발리에 머물렀다. 매일 서핑을 하고 해변에서 멍 때리고 쉬다가 저녁에는 멋들어진 선셋을 감상하고 숙소에 들어와 쉬는 평온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아직 서핑 초보였던 나는 파도를 잡고, 파도 위에서 안정적으로 일어나 오래 나아가는 것을 연습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위와 같은 부분들이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느꼈고, 앞으로 어떤 스타일의 서핑을 할지 생각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예전부터 숏보더들이 멋있어보였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단연코 퍼포먼스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좀 더 짧고, 날렵한 보드를 타고 서핑하기를 즐겼다.
발리에 머문 지 두 달 되었을 무렵, 내가 양양에서 다니던 서핑샵의 사장님과 서핑 강사, 스텝들이 발리 한 달 살기를 위해 입국해 나와 같은 마을에 숙소를 구했다. 나를 그렇게나 보살펴주던 그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너무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양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께 즐겁게 서핑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가 서핑하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과연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르기를 이 좋은 발리 파도에서 두 달 탄 것 치고는 서핑 실력의 발전이 너무 적다하였다. 그리고 길이가 짧은 보드를 타니까, 보드가 주는 안정성이 부족해서 패들링부터 테이크오프까지 모든 기본 기술의 자세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들이 발리에서 서핑하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마치 전지훈련 간 것처럼 선생님을 두고 매일같이 온종일 서핑만 한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쉬고 발리를 잘 즐기면서 서핑도 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없었으며, 어쨌든 그들이 서핑 실력의 발전을 원하는 나를 보살피는 차원에서 저런 말을 했다는 점에서 웃고 넘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당시만 해도 내가 두 달이라는 행복하고 여유로웠던 시간을 홀라당 날려버린 죄인이 된 건가 하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시무룩해져서, 꼬박 몇 주간이나 서핑이 전혀 즐겁지 않았던 상태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서핑하기를 피했음은 물론이고 바다 밖에서도 그다지 자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꼭 저들 뿐 아니더라도 나의 서핑라이프에 어떻게든 훈수를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이따금씩 나타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 서핑을 즐길지는 세상의 다른 모든 분야와 같이 어디까지나 내 몫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퍼포먼스 스타일의 서핑을 계속 이어가서 로망이던 숏보드를 사서 시도해보기까지 하였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기로에 서 있다. 30여 년의 짧지 않은 인생. 한 번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살아 본적도, 그것이 어떤 모습의 것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저 무시 받고 싶지 않았다. 동정도 싫었다. 당연한 듯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 익숙한 그 감각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주어진 자원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매일, 매순간 내가 갖고 모든 있는 것을 쥐어짜내 무언가를 만들어내어,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곳에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외면할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내가 있었다.
발리에서 6개월을 보냈다. 좋은 때가 많았지만 힘든 때도 있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생활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드는 때도 숱했다.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개월을 서울에서 보냈다. 일할 때 구해 지내던 강남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쉴 수가 없었다. 매일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나도 무언가 공부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영어 학원을 등록해 매일 오전 출석했다. 오후에는 집에서, 이따금씩 카페에서 종일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가 다른 어느 때보다 훌쩍 늘었다. 외로웠다.
여름이 되었다. 발리에서 서핑하며 만난 서퍼의 대부분이 공교롭게도 부산 사람이었다. 그들의 초대로 부산의 서핑 스팟, 송정 해변을 찾았다. 서핑 때문에 급속히 발전된 것을 제외하면 낙후된 바닷가 마을에 지나지 않은 양양에 비해,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서핑하는 느낌은 굉장히 신선했다. 송정 해변은 서핑 스팟으로 발전되기 전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었기 때문에, 해변을 따라 음식점과 카페, 호텔이 즐비해 있었다. 그러한 가게들 바로 앞이 백사장이었고 서퍼들이 서핑을 하러 그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송정 해변은 내가 서핑하던 양양의 네댓 배는 족히 넘을 정도로 넓었다. 서퍼들이 많았지만 넓은 해변에 분산되어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바다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유롭고 정 많은 서퍼들이 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서핑을 하며 나는 생각했다. 비록 부산에서 만난 몇 서퍼 외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사는 것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의 삶보다 나를 훨씬 덜 외롭게 하겠구나.
서핑이라면 익숙한 양양을 찾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곳은 서울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한데, 나는 최선을 다해 서울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나에게 삶의 고단함을 주었고, 쉬기 위해 직장을 떠나있는 지금까지 나를 결코 쉬게 만들지 못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모든 것이 넓었다. 바다도 넓고, 바다 위로 보이는 하늘도 크고 널따랬다. 해변으로 향하는 도로도 넓다. 여행 중 만난 경상도 사람들의 마음도 서울 사람들보다 한참이나 넓고 여유로워 보였다. 높고 기다란 건물로 가득해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내 시야가 하늘에 한 번 닿지 못하는 강남과는, 서울과는 달랐다. 계속해서 노력해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내 자신이 바닥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서울과 달리, 이곳에서는 그 동안 내 안에 꾹꾹 욱여넣은 나의 좋은 것들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가 본래부터 타고난 혹은 지금까지 부단히 노력해서 가진 좋은 것들을 내 눈으로 바라보며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보살피고, 평온함을 느끼며 쉬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 달 살기 정도를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부동산에서, 집 한 쪽 면이 바다를 향한 창으로 되어 있고, 귀퉁이에 붙은 창에서는 송정 바다가 보이고, 거실이 운동장만큼 넓은 방 두 개짜리 빌라를 소개받았다. 벽이나 문, 복도 할 것 없이 마감이 훌륭했고, 집 부근은 주택가로 조용했으며, 송정 해변은 걸어서 3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물론 많은 액수의 대출이 필요했지만 금전적으로 강남 오피스텔의 전세금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입주가 가능했다.
여행자에 지나지 않던 나는 덜컥 가계약금을 송금했고, 한 달 남짓 지나 이사도 마쳤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일이 있었다. 삶이 늘 그렇듯, 큰 기대를 품고 온 이 곳에서도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고 좋은 사람만 만나지는 않았다. 여행 때처럼 내면적으로 좋은 상태만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결코 불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오랜 기간 서핑을 할 수 없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내가 나에게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이곳에 살기로 허락해 준 것은 결단코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살아본 적 없던 스타일의, 다양한 시도를 하는 삶을 통해, 버리고 싶던 것들을 일부라도 버렸고 그것들이 버려진 틈을 통해 다른 좋은 것이 내 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곳은 이제는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있다. 어떤 스타일의 내가, 앞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앞으로도 한참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나의 서프 버디들과 함께 서핑하며 힘을 잃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