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에서 받은 상처가 충분히 아물어 변호사 일과 로스쿨에서 공부한 시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라 수 있고, 건강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회복된 후에는 어떻게 다르게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들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중이었고 변호사 일이 앞으로 나에게 줄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내가 타고난, 단점이라고만 할 수 없는, 공감능력이란 부분을 고쳐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평생 스스로를 남들보다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계속해서 주변 환경에 맞추어 나를 바꾸고 거슬리는 무언가를 극복해 정상궤도에 나를 올려놓아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사라고 하면 사실 단연코 정상궤도 이상이 아닌가. 나의 다른 부분이 정상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직업적인 부분에서 정상 이상에 올라가 정상 기준선을 초과한 부분이 나의 비정상성을 가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곳에 다다라서도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나의 또 다른 비정상성일 뿐이었다. 끝도 없는 정상과의 싸움에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변호사 일을 지속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월급으로 마음 놓고 소비를 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한을 극복할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연애 사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었지만, 변호사가 아닌 친구는 아직도 힘들어하는 나를 안타까워했고, 변호사인 친구는 이미 변호사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나의 바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혼란 가득한 상태로 시간은 흘렀고 그만하겠다는 결정도 쉬이 내릴 수 없었다.
변호사는 의사처럼 시험에 합격 해 면허가 지급된 후에 인턴, 레지던트와 같이 눈에 보이는 수년간의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래서 법조계에 있는 선배들은 나에게 말했다. 변호사가 되면 최소한 3년은 재판을 열심히 다니면서 재판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고. 그렇게 3년을 열심히 재판한 후에라야 일반 기업에 가거나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당당하게 변호사임을 어필하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일단 변호사로 3년을 버티기로 결정했다.
나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서핑을 하며 양양에서 보내던 시간들이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나를 부정할 필요도, 나를 바꾸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무언가를 꾸며내는 것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나는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들은 그러한 나를 반기고, 좋아하고, 보살펴주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 본 일이 언제던가. 9살 때 엄마를 만나 함께 살게 된 이후로 보살핌에 대한 욕구는 내 안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하루하루 무탈하게 보내고자하는, 안정에 대한 갈망과 그렇지 못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가득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하여졌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갈 곳을 잃은 책임감이 분노가 되어 돌아왔지만 해소는커녕 표현할 방법조차 없었다.
양양을 찾게 된 이후, 나는 막내 여동생처럼 보살펴졌다. 나이로 가장 막내는 아닐 지언즉 서핑 경력으로 나는 막내에 다름없었다. 양양의 먹거리, 즐길 거리에 대해서도 이제 알아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여기로, 저기로, 데리고 다녔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것을 하자고 하였다. 나를 보살피는 사람들이 많은 그 곳에서 나는 책임 질 것이 거의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면서 행복하면 될 뿐이었다. 늘 불편했던 위가 그 곳만 가면 편해졌다. 그 곳에서 만큼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불편하지 않았다.
서핑 할 수 있는 해변을 ‘서핑 스팟’이라고 부른다. 양양만 해도 죽도 해변, 인구 해변, 기사문 해변, 남애 해변을 비롯한 많은 서핑 스팟이 있다. 서퍼들은 방문의 편의나 선호하는 서핑샵이 위치하는 것 등 여러 이유에 따라 주로 가는 서핑 스팟을 정해놓고 그 곳에서 서핑을 즐긴다.
평소 서핑을 하던 서핑 스팟에서 벗어나 같은 지역에 있는 다른 스팟, 혹은 다른 지역, 나아가 다른 나라에 있는 서핑 스팟까지 서핑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을 두고 ‘서핑 트립’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서핑하기 위해 여행 간다는 것이다.
서핑에 푹 빠진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변호사 업무 특성상 법원에 재판이 잡히지 않는 기간에 휴가를 용이하게 쓸 수가 있다. 이 기간이 1년에 여름과 겨울 각 2주인데 변호사들은 흔히 이 때 1주일의 여름휴가를 가고 상황에 따라서는 겨울휴가도 가능하다.
다행히 당시 일하던 곳에서 1주일의 겨울휴가를 받을 수가 있었고 나는 차디찬 동해바다를 떠나 따뜻한 남쪽나라 대만으로 서핑 트립을 떠났다. 지금은 대만 서핑 트립이 활성화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겨울 서핑 트립이라면 한참 남쪽에 있는 인도네시아 발리나 필리핀의 시아르가오라는 곳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곳들은 일주일 일정으로 다녀오기엔 너무 비행시간이 긴 감이 있었다. 서프 버디 중 누군가를 통해 대만에서도 서핑 트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대만에서 6개월간 중국어를 공부하며 지내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렇게 나는 ‘衝浪(冲浪)’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대만 남부 휴양 도시, ‘컨딩’으로 서핑 트립을 떠났다.
내가 6개월간 대만에서 지내며 느낀 점은, 대만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과 상당히 비슷한데 좀 더 친절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약 10년 만에 찾은 대만의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했으며 거기에 서퍼들의 친근한 감성까지 더해져, 혼자 서핑 트립 떠난 나를 대단히 환대하고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나는 10년 만에 더듬더듬 입을 열어 중국어를 해 보였고 의사소통의 장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지자 그들은 더욱 기뻐했다.
대만의 최남단 컨딩, 여기저기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게 분위기는 제주도와 비슷했고 날씨는 한겨울에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닐 만큼 열대지방 나라와 비슷했다. 대만 남부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격의 도시인 ‘가오슝’에서 차로 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해있어 휴양지이지만 도시의 편의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 곳의 가장 유명한 서핑샵에서 서핑 강습을 받고, 숙식을 하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낮이면 함께 서핑을 하고, 밤이면 함께 밥을 먹고, 야시장엘 구경가기도하고, 파티에도 초대받아 갔다. 주말마다 서울과 양양을 오가는 서퍼들처럼, 이곳에도 수도 타이베이에서 일을 하면서 서핑을 위해 컨딩을 오가는 서퍼들이 있었다. 내가 양양에서 다니던 서핑샵처럼, 이곳의 서퍼들도 사장과 직원, 손님을 가리지 않고 다함께 어우러져 즐겼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이국적인 환경에서, 익숙한 서퍼들의 감사한 보살핌으로 나는 양양에서보다 마음의 긴장을 더 내려놓을 수 있었고 온전한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변호사 일을 다시 했지만 나는 그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설 연휴를 이용해 한 번, 그리고 삼일 절 연휴를 이용해 또 한 번, 거의 달에 한 번 꼴로 컨딩을 또 찾았다. 그렇게 나를 보살펴주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바다 안에서, 밖에서 위안이 되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컨딩에서 작은 규모의 서핑샵을 운영하는 부부네 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머무른 일이 있다. 친구는 큰 개 한 마리와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는데, 전날 숙취로 낮잠을 자려고 누운 내 곁에 고양이들 중 한 마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처음 본 고양이가 나의 팔을 베게 삼아, 내 팔을 양 발로 꼭 쥐고 머리를 대어 곁에 눕는 것이 아닌가. 아주 어렸을 때 말곤 동물을 키워 본 일이 없고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에게, 그와 같은 동물과의 교감은 굉장히 놀라우면서 새로운 것이었다. 나는 이 교감의 순간을 늘리고 싶었고 자칫 고양이가 불편해 나를 떠나갈까 봐 큰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앞으로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쥐려 하며 뒤에서는 무언가가 쫓아오듯 숨 막히게 살아온 이 삶에서 쉼과 잠이라는 동물적 욕구에 충실한 상태로 다른 동물과 교감하는 순간이 주는 평온함이라니. 나는 그 감각에 심각하게 매료되었고, 내 삶에 그와 같은 종류의 감각이 존재하는 순간이 많아지기를 고대하게 되었다.
주중에 모든 욕구를 꽁꽁 싸매고 스스로 타고난 인간됨을 부정하고 기계처럼 일하다가 주말에나, 그것도 체력 문제로 한 달에 한두 번 양양을 찾아 조금 쉬다 오는 것 말고, 몇 달에 한 번씩 손꼽았다가 해외 서핑 트립을 가는 것 말고, 평일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내가 조금 더 평온함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느끼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었다.
처음 일했던 곳에서 보다 규모가 훨씬 큰, 해외에도 지사를 둔, 체계가 잘 잡힌 법무법인으로 이직한 뒤 나의 변호사로서의 업무 능력은 훨씬 좋아졌다. 좋은 선배들과 동료들, 그리고 기존의 데이터를 통해 배울 점이 많았다. 유명 법무법인이 재판의 상대방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제작한 높은 수준의 자료가 재판에 제출되었으며, 이를 확인하고 대응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익힐 수 있었다. 사건의 유형과 크기도 훨씬 다양해져 업무 능력은 날로 올라갔다. 의뢰인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선후배, 동료, 사무직원 분들과도 잘 지내서 여러 방면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 재판에서의 좋은 결과가 쌓여갈수록 나는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내면적으로 지쳐가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심신이 계속 피폐해져갔다. 그런 수많은 날들을 보내다가 대만을 찾았고, 쉼에 대해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변호사 일을 시작한지 3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나는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났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서핑을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