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방문으로 식사의 불편함이 조금씩 줄어가고 기분도 점차 나아지고 있을 때쯤, 이러면 호주 곧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관광비자나 학생비자가 그 선택지였다. 호주에 가면 영어 학교를 다니며 영어 실력을 늘릴 계획이었기에 영어 학교 등록이 가능한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학생비자뿐 아니라 관광비자 역시 관광비자의 체류 한도인 3개월 안에서 수업을 등록해 학교 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학생비자는 3개월 이상으로 학교를 등록하는 경우에 받아야 하는 건데 내가 과연 3개월이 넘어가도록 영어학교를 다닐 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고 비자 발급 절차나 비용도 복잡하고 비쌌기 때문에 관광비자를 선택하고, 다니고 싶던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부산에서 신청을 대행해 주는 유학원을 찾아 사무실에 가서 레벨테스트를 보았다. 학기가 6주 단위로 쪼개어져 있었기에 3개월 전부를 한 번에 신청하기보다 우선 첫 6주 수업을 듣고 보자는 생각으로 6주만 등록하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과는 계획 단계에서부터 진행 상황을 공유했고, 처음 내 계획을 듣고 내가 무언가를 도전하고 새로 시작하는 데에 대한 굉장한 기쁨과 지지를 표했다. 중간에 의욕이 떨어져서 호주 그냥 가지 말까 한다 할 때에는 안 된다며, 호주 꼭 가야 한다고 나를 다잡았다. 출국 시점도 함께 상의하면서 그전까지 약을 점차 줄여나가다가 안전하게 종료할 수 있게 하겠다며, 그것은 본인의 의무라며 호언장담하셨고, 물론 실제로 불편함 느껴지지 않게 그렇게 해 주셨다. 6개월 정도 방문하며 복약했고 많은 심신의 도움을 얻었다. 이제는 정말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였다.
레벨테스트에 통과해 원하는 레벨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 부분은 잘 되었는데, 가서 지낼 집을 알아봐야 했다. 수업 하루 전 날 오전에 입국하는 일정으로,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집을 구할 시간이 없기도 했고, 어치파 요즘은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한국에서 시간이 있으니 최대한 알아보고 가고 싶었다. 이제는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주거형태인 셰어하우스에서 지내고 싶었다. 셰어하우스는 보통 주방이나 욕실과 같은 공용공간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데, 보통 침대나 책상 혹은 옷장과 같은 기본 가구가 포함된 침실 한 개를 혼자 사용하는 형태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침실을 이층 침대나 작은 침대 두 개 이상을 가지고 룸메이트와 공유하기도 한다. 2008년도 시드니에 살 적에는 이층 침대 두 개를 둔 침실에서 나를 포함한 4명의 여자가 쓰기도 했다.
셰어하우스를 찾을 수 있는 어플, 웹사이트를 다운로드하고 방문해서 많은 집들을 보고 메시지를 보내었다. 집주인들에게 연락이 얼마나 가는지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메시지에 아무런 답장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와서, 호주에 도착하는 즉시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브리즈번과 퍼스를 둔 오랜 고민 끝에, 서핑을 할 수 있는 해변이 동부 해안을 따라 많이 있는 브리즈번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브리즈번이 주의 수도로 있는 퀸즐랜드라는 주는 사계절 날씨가 좋아서 날씨 보고 머무르는 한국인들이 브리즈번에 많다며 2008년도부터 들었는데 결국 가 보지 못해서, 이번에 가서 지내보고 싶었다. 퍼스는 주변에 대도시가 없고 내륙 쪽으로 들어가면 금방 야생과 사막을 느낄 수 있다는데, 사는 것보다 기회가 되면 지내는 동안 여행으로 근방을 돌아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에서 브리즈번을 오가는 젯스타 직항 항공권을 3개월의 텀을 둔 왕복으로 구매했고, 부산에서 이른 아침 인천공항 직항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려와 공항에서 오후를 보내다가 저녁 늦게 가 되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밤 비행, 9시간 반, 최대한 잠을 자면서 오려고 했고, 덕분에 시간이 금방 갔다.
브리즈번 공항 밖으로 나와 처음 든 생각은 생각보다 선선하다는 것이다. 나는 2월 10일쯤에 도착했는데, 호주가 속해 있는 남반구 2월이면 대략 우리나라 8월에 속할 만큼의 한여름이고, 코로나 전에 호주에서 지내다 온 친구 말로는 4월까지 엄청 덥다고 하여 얇디얇은 여름옷만 챙겨 왔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옷을 잘 못 가져왔다며 스스로를 탓하며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다 나온 탓에 피로가 가득한 데 정신을 부여잡고 약속한 집을 보러 갔다.
이번에도 부치는 짐은 기본 단위인 20kg이 훌쩍 넘은 24kg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히 20kg를 넘을 것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기본 단위를 초과하는 30kg의 부치는 짐이 포함된 항공권을 샀기에 예전에 코끝 찡한 친절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잠도 잘 못 자고 나온 상태에서, 기차를 탔다가 브리즈번 시내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내려서 약속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은 코끝이 찡해질 만큼 고생을 했다.
약속한 집에 도착했고, 평범한 인상의 젊은 백인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나 정말 막 비행기에서 내렸어, 브리즈번에서 누군가를 이렇게 만날 약속을 하고 오니 참 좋다'며 2008년도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하지만 아직 긴장이 잔뜩 들어간 영어로 또박또박 이야기하며 인사를 나누고 집을 보았다. 집은 솔직히 해도 잘 안 들고, 안팎으로 정리도 잘 안 된 편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집주인들에게 연락했는데 이 사람 한 테밖에 연락이 안 온 거라면 더는 수가 없지 않을까. 이미 지치기도 했고 약간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여기서 지내겠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방이 준비가 되어 있으면 바로 짐을 풀 생각에 공항에서부터 바로 온 건데, 집주인은 방 청소가 필요하다고 했고 삼일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삼일 정도 지낼 수 있는 임시 숙소를 알아보겠다며 집을 떠났다.
일단 구글 지도로 여행자 임시 숙소인 호스텔을 검색하니 가장 가까운 곳이 도보 15분 거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기에는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온 짐을 밀다 끌다 하면서 걸어갔는데, 그때 결코 2월의 브리즈번이 선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도착한 곳은 예전에 여행 다니며 경험했던 것과 달리 높다란 빌딩 안에 위치한 곳이 아니라, 큰 단독주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울타리가 쳐진 넓은 부지에 비슷한 모습을 한 두어 개의 단독주택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부지 내에는 주차장뿐 아니라 정원과 같은 여유 공간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좋고 싫고를 따질 새 없이 나는 어서 이 짐을 숙소 한편에 두고 누워서 쉬고 싶었고, 리셉션으로 가자 굉장히 인상 좋게 생긴 여자 직원이 예약도 없이 삼일 지낼 방 좀 달라는 나를 당황한 기색 없이 반겼다. 간단하게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앞서 있던 일을 설명하자 직원은, "잘 왔어. 여기가 바로 'Somewhere to stay(섬웨어 투 스테이, 한국어로 하면 '머물 수 있는 어딘가'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특별한 예약이나 준비 없이도 언제나 찾아가서 머물 수 있는 곳의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겠다)'야"라고 경쾌하게 말했다. 물론 이 때는 내가 여기에서 앞으로 1년을 지내게 될 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