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디 Apr 06. 2019

미용실의 고객 경험에 관하여

무지(MUJI) 같이 담백하고 편안한 미용실은 없을까?

사람-대-사람의 인터렉션보다 기계와의 인터랙션이 좀 더 편하다고 느끼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특별히 미용실이라는 공간의, 모든 동선에서 일관되게 과도한 고객 경험은 매우 부담스럽다.


미용실 경험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헤어 디자이너와의 느슨한 인간관계


헤어 디자이너는 회사 동료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자주, 그리고 일정하게 만남을 유지하는 관계다. 

게다가 일단 한 번 만나면 단 둘이, 30분~1시간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헤어 디자이너는 고객과의 라포를 쌓아야 하니 뭐라도 말을 걸어야만 한다. 

'헤어스타일' 말고는 공통된 관심사를 찾기 어려우니 주로 나누는 대화는 결혼, 가족관계, 지금 살거나 살았던 곳, 직장, 오늘 날씨, 연예인 걱정.. 등등.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런 저런 시덥잖은 정보들을 조합해보면.. 이 정도로 나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상대방이 나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 굳이 나의 개인정보를 밝히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때론 헤어 디자이너가 묻는 질문들에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도 있다.


얼마 전에는 내가 다니던 직장을 기억하고 있던 헤어 디자이너가, 혹시 그 회사 출신인 OOO 아냐며, 그 새끼 남자가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며 미용실에서 직장 동료 근황을 들은 적도 있더라는. 행실을 바르게 합시다


아무튼 이 얕지만 빈번한 인터랙션으로 인해 꽤 가까운 관계가 만들어지고, 이 관계는 단순히 머리 자르는 용역에 대한 값을 지불한 고객에게 예상하지 못한 관리 포인트를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2. 스탭과의 일회성 만남


한 번 관계를 맺으면 최소 1년은 가는 헤어 디자이너와의 그것과는 달리, 미용실 스탭들과의 관계는 더 빈번하게 맺고 끊음이 일어난다. 내가 다니던 미용실에서는 방문할 때 마다 거의 항상 새로운 스탭이 나를 상대해 주었다. 


이런 일회성 만남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그저 주문을 받고 물건을 내 주는 다른 업종의 점원들과 달리, 더 밀접한 인터랙션이 일어나는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고 상대도 나에 대해 아는 것 없이 '일회용품'같은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아서이다. 그 사람을 일회용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정성스러운 서비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령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처럼 환대해준다던가, 배우자도 해주지 않는 머리 감겨주기라던가− 나는 이 일회성 만남이 불편하다.


이 만남이 가장 불편한 지점은 스탭과 내가 단 둘이 남겨진 때이다. 바로 머리를 감겨줄 때. 이 때 일어나는 고객과 스탭 간의 대화(아마도 매뉴얼에 따른)는 정말이지 지속성이 없는 것들이다. 최근에 내가 스탭과 나눈 대화는, 25살 이전에 결혼을 하고 싶은 스물 한 살의 스탭이 얼마 전 사주를 봤고, 결혼을 일찍 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왜 그렇게 결혼을 빨리 하고 싶냐고 물었고, 그 스탭은 '다른 친구들이 벌써 결혼을 해서'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내 주변엔 단 한 명도 그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한 사례를 찾지 못해 당황했었고 그렇게 우리 둘의 −아마도 다시는 없을− 대화는 끝났다. 



3. 꾸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매장 분위기


어차피 미용실 가면 머리 감을 거니까 씻지 않은 상태로 모자만 푹 눌러쓰고 츄리닝 입고 편하게 다녀오고 싶은데, 미용실이라는 곳의 인테리어와 배경음, 다른 고객들의 차림새, 직원들의 친절하면서도 당당한 태도 등은 왠지 이 곳에 꾸밈없이 갔다가는 무시당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백화점 갈때 추레하게 가면 무시당하기(또는 무시당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기) 십상인 것 처럼.  


일단 인테리어부터 우드 스타일의 네츄럴한 느낌이 아니라, 반짝반짝한 것들의 향연이다. 조명도 반짝반짝하고 바닥도 반짝반짝. 그리고 수십 개의 반짝반짝한 거울들이 사람을 내려보듯 위협적으로 우뚝 서 있다./ 진한 메이크업과 장식적인 헤어스타일을 가진 직원들이 네이버 쇼핑 첫 페이지에서 본 것 같은 최신의 복식을 하고 무한리필 참치집 실장 만큼이나 과장스러운 인사를 한다. / 스피커에서는 SPA 매장에서나 나올 듯 한 비트가 강한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 나는 단지 머리가 길어서 자르러 왔는데 다른 손님들은 꼭 졸업하고 10년만에 열린 동창회에 가는 것 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준 느낌이다.




이니스프리 매장에 가면 두 개의 바구니가 있다.

하나는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써 있고, 다른 하나는 '혼자서 볼게요'라고 써 있다. 

점원의 서비스(또는 방해)를 받지 않고 싶다면 '혼자서 볼게요' 바구니를 들고 쇼핑하면 된다. 

그럼 정말 점원들은 RPG 게임의 NPC처럼 고객을 주시할 뿐 다가오지 않고, 고객은 내키는 대로 구경하다가 필요하면 점원을 부르거나, 아니면 '다음에 올게요' 같은 핑계 없이 휙 매장을 나가버릴 수 있다.


물론 화장품같은 공산품을 판매하는 매장과, 사람의 용역을 판매하는 매장은 취급하는 재화/서비스 자체의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겠지만, 이 일관되게 과도한 경험을 어느 정도 중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만약 AI가 머리를 잘라주고 감겨준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미용실을 갈 것 같다. 

이전 09화 UX디자이너의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