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귐이 자유롭다고 느낄 때
20대의 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나를 규정하려고만 했다. 금, 토요일에는 약속이 없으면 온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된 것 처럼 우울했고 친구목록을 뒤져서 어떻게든 약속을 만들어야만 했다. 만나는 여자가 없을 때는 어떻게든 주변의 이성들에게 건덕지를 만들어 호시탐탐 접근할 기회만 노렸다. (물론 성사되는 일은 잘 없었다.) 인싸가 되고 싶어서 안달을 내기도 했다. 잘생긴 친구와 함께 다니면 나도 두세 레벨은 더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우월한 그 친구와 캠퍼스를 걸어다니는 것이 좋았다. 내가 '병풍'처럼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받기 전까지 그 친구의 충실한 병풍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20대는 너무 미숙했고 많은 실수가 있었고, 무엇보다 찌-질-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20대가 아닌, 30대의 지금 내 모습이 좋다.
30대의 나는 소득이 있고 그 돈을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꽤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5만원정도는 큰 고민없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별한 날엔 십만원이 넘는 근사한 식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쟁쟁한 수컷들 사이에서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겠으나 다행히도 남들보다 이른 시기에 지금의 아내를 맞이하는 천운을 맞게 되어 번식 대스매치에서도 한 발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30대가 되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보다도 내가 삶에서 맞닥드리는 수 많은 인연들 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만나지 않을 지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 모든 사람에게 잘 할 필요 없이, 내가 필요한 사람만 골라서 사귈 수 있게 되었다.
-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얘기에 맞장구쳐주는 역할이 되어버리기 십상인 6명 이상의 단체 모임은 미련없이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 몇 번 이야기해보고 어라? 나랑 결이 너무 다른데? 싶은 사람은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티 안나게 피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게 되었다.
인연이라면 애써 피하려고 해도 다시 만나게 되고, 인연이 아니면 기를 써 봐도 가까워지기 힘든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가 아닐까. 어런 저런 계기로 어떻게 가까워졌다가도 또 평생 다시 보지 않을 것 처럼 쉽사리 멀어지는 것도 어른들의 사귐이 아닌가 한다. 사람에게 메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자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