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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Apr 19. 2023

0. 나도 재밌게 살고 있거든?

그럴 거거든?

"너 진짜 재미 없게 산다."


날것의 내 근황을 듣던 지인이 내 인생에 내린 한줄평이다. 한 오 년 전 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분했던지, 그에게 침을 튀겨가며 내 인생의 재미를 설득시켰다. 물론 그건 소용 없는 일이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하면 딱히 설득할 필요도 없긴 했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 가도록 클럽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외국인 얼굴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국 영화는 보지도 않으며, 와인도, 위스키도, 스쿠버다이빙이나 등산, 하다 못해 무한도전 이후로는 TV 예능이나 넷플릭스조차 보지 않고 있으니 뭐, 남들이 보기에 인생이 심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얌전하게 선생님을 쳐다보는 게 학급 규칙이던 시절에는 또래들에 비해 제법 인내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땐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저녁시간까지 책만 읽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내 인생에 할당된 인내력을 그 꽃답던 나이에 다 써버린 게 틀림 없다. 바보 같은 나. 그러니 이제 두 시간짜리 영화조차 보지 못하는, '모든게 찰나인 삶'을 살게 된 거다.


그렇게 얼레벌레 살다 보니 나는 취향이 없다. 무언가를 깊이 파고 들고, 무언가에 몰두할 에너지조차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식당은 몽땅 맛있고, 오늘의 집에서 랭킹 1위를 하고 있는 소품은 여지없이 마음에 든다. 네이버 영화 평점이 8점이면 나도 딱 그만큼, 9점이면 나도 딱 그 정도로 만족한다. 입맛이 예민하고 듣는 귀가 예민하며 보는 눈이 예민한 사람을 따라가야 진짜 좋은 걸 경험할 수 있다는데 난 누구를 따라가도 만족한다. 나에게 선택의 고통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속도 없이 싱글벙글이다. 웃긴 건 그 와중에 편견은 또 많아서 한번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신 상종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내 취향이 이 나이를 먹고도 이제 막 집어던진 지점토 덩어리 만큼 형체가 없는 건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다.


좀 심심하다 싶다가도, 근검절약에 최적화된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던 내가 위기감을 느낀 건 우연히 본 100문 100답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학생 때 유행하던,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나를 주절주절 설명하는 셀프인터뷰같은 거였다. 이제 철지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100문 100답을 SNS에서 맞닥뜨린거다. 여전히 심심했던 나는 오랜만에 그 질문들에 대답을 해보려 했는데, 타고 난 신상정보 외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인생영화도, 인생드라마도 모르겠고 특기는 고사하고 취미조차 대답할 수 없는 인생이라니. 난 그 때 비로소 내 삼십삼년 인생이 단단히 얼레벌레 흐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소개팅에서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대충 '저는 쉴 때 책을 읽어요.'라고 둘러대고, 막상 사귀고 난 후에는 독서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아, 남자친구로부터 "자기, 독서가 취미라고 하지 않았어..?" 하는 의심의 눈초리나 받는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정말로, 소개팅에서 "저는 주로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잘못한 주제에 뻔뻔하게 말하건대 나는 이제 적당히 용서받고 싶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인생에 마디가 많아야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건 삶의 스냅샷의 갯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며, 애써 기억해야 기억으로 남는다는 거다. 불행하게도, 그냥 흐르는 대로 사는 인간의 삶에는 마디가 별로 없다. 밥벌이를 시작한 이후의 내 삶은 스냅샷 두 장 정도로 퉁쳐진다. 다른 사상을 가진 인간과 부대끼는 걸 싫어하고 자기계발의 의지도 별로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지금도 자기계발의 의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탈출구가 필요하다. 나는 요즘엔 내 일에 과몰입 중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직업이 가장 반짝이던 시절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늘에서 딱 한 뼘만큼 점프했을 그 순간에 발령을 받았다. 나는 내가 등에 날개를 단 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번지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쭉쭉 추락 중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은, 딱 한 번 쯤은 다시 튕겨 오를지도 모른다는 것뿐인데, 곰곰이 생각하니 이게 번지줄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게 진짜 문제다. (생각할수록 썩은 동앗줄 같다.) 어쨌든 나는 이 지경이 된 지금까지도 내 일을 사랑해서 매일이 괴롭다. 괴로운 삶은 잠을 좀먹고 정신을 좀먹고 의지를 좀먹으면서 무럭무럭 큰다.


그러나 괴롭다고 죽어버리기엔 무서우니 나는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 특별한 재능이나 밑천이 없어 일을 때려치우긴 힘드므로 나는 퇴근 후에 업무 스위치를 꺼버리는 걸로 타협을 볼 생각이다. 퇴근 후에 피곤하다고 내버려뒀던 퇴근 후의 삶을 살아내야지. 아무 거나 헤집어보고, 새로운 걸 해보고, 취향을 찾아서, 누가 "인생영화가 뭔가요?"라고 물으면, 눈이 반짝반짝해서는 신나게 영업할 수 있는 인간 정도는 되어 봐야지.


원래 외국 영화를 못 봐. 원래 그 장르는 싫어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하던 모든 방어막을 하나씩 벗기고


삶에 도끼질을 하면

언젠가 그 자리에 새 살이 불룩하게 돋을 것이고

그건 마디가 될 거고 삶이 될 거다.


게다가 마침 서른 넷이다.

어쩜!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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