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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Apr 20. 2023

1. 갈비뼈 닫고, 정수리를 뽑으세요.

그게 뭐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나도 재밌게 살고 있다고, 아니 사실 지금부터 그렇게 살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이제야 글을 쓴다. 이후의 삶도 밍숭맹숭했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은 엉덩이를 걷어차이기 전까진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누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진 않았지만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아서 글을 쓴다. 나는 무려 필라테스 8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어제 필라테스 선생님이 내 네 쪽짜리 엉덩이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작정을 하고 괴롭히신 탓이다.      


나는 평생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재능이 없다. 다리를 일자로 찢어본 기억은 일단 없고,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의 그 유구한 유연성 검사 역사 내내, 손 끝이 측정기 철판 끝에 가 닿은 적조차 없다.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지만 나는 구르기도 잘 못했다. ‘너는 공부 빼고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친한 지인들의 공통된 소견이었다.


도대체 피구가 뭐가 재밌단 건지, 저놈의 까까머리 남자애들은 왜 체육을 못해 환장인 건지 모든 게 수수께끼 같던 시절을 지나, 나는 마침내 보건소에서 “살려면 운동하셔야 해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는 꽃다운 20대 중반이었다.     


배가 조금 볼록하고 (‘조금’은 퇴고 중에 꾸역꾸역 쑤셔 넣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뛸 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전문가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나는 겸허하게 내 몸 상태를 받아들였다.      


지금처럼 물가가 오르지 않아 지금보다 덜 가난하던 초임 시절, 나는 죽기 전에 다리를 한 번 쯤은 찢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성인발레학원에 등록했다. 핑크색 전신 쫄쫄이를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인증샷을 하나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니, 혹시 분홍 소세지냐는 답장이 돌아왔다. 친구가 진짜로 헷갈리는 것 같아서, 스커트를 두르고 있는 것이 너의 친구요, 대가리가 달리지 않은 것이 분홍소세지일 것이라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다리를 벌린 채 앞으로 몸을 숙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모두 앞다투어 고개를 조아릴 때, 라이언킹의 무파사 마냥 고개를 쳐들고 그 모든 광경을 뻘쭘하게 바라보던 22살 그 때처럼, 발레학원에서도 나는 자꾸 선생님과 민망한 눈맞춤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나름 만족해가며 한 달 가까이 학원을 다녔다. 처음 점프를 하던 날, “태어나서 처음 뛰어보시는 것 같네요.”라는 무용 선생님의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PT도 물론 시도해봤었다. 헬스장의 모든 기구들은 몽땅 괴상하게 생겼으므로 일단 습관이 들 때까진 개인 트레이닝을 받겠다는 각오였다. 돈이 아까우니 그만두진 못할거라는 심정으로 거금을 결제했고, “이건 재활 수준인데요.”라는 트레이너의 얘기에도 두세 번이나 더 다녔는데, 어느 날 나를 바로 앞에 두고서 헬스장을 방문한 손님을 상스럽게 욕하는 모습을 보고, 스쿼트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다간 언젠가는 덤벨로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운동을 그만두었다. 횟수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끝냈으니 그 트레이너는 막말의 대가로 대충 몇 십 만원 어치의 보너스를 받은 셈이다.     


그 후로도 실내 클라이밍, 플라잉 요가 등 나름 유행한다는 운동을 추가로 시도해봤지만 애석하게도 모두 한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탱글탱글한 뱃살이 만년설처럼 쌓여가고, 퇴근만 하면 일곱 시부터 졸음이 밀려오는 서른셋이 되자 이러다가는 연금을 받기도 전에 죽고 말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연금 40년 수령에의 꿈을 이루고자 필라테스를 시작한 거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갈비뼈를 잠그고 정수리를 뽑고 골반을 말고 배꼽을 등에 붙이라는, 사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시사항을 50분 내내 하는 재주를 타고 나신 분이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배꼽을 등에 붙이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는 어김없이 다른 수강생들을 제치고 내 옆으로 오셔선, 내 통실통실한 배를 손으로 한번 꾸욱 누르신다. 배를 더 넣으라는 무언의 지시일텐데, 그건 이미 내가 호홉!하고 옹졸한 입모양을 하며 청바지를 입을 때마다 행하는 최대치의 노력이므로 별 소용은 없다.     

 

그럼에도 필라테스 선생님은 배를 더 집어넣으라고 나를 윽박지르지 않으시고, 내 숨이 넘어갈 때면 같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숫자를 외쳐 주시며, 그랬을 리가 없어도 “잘했어요!”라고 시원하게 칭찬도 해 주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팔 개월이 지나도록 나와 눈을 맞추거나 나를 아는 척 하지 않아주시기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을, 거지꼴을 하고 필라테스를 하러 간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나는 운동을 할 때마저도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혼자인게 좋은 사람인가보다.    

 

나는 여전히 다리를 못 찢고 내 갈비뼈는 여전히 문단속을 못하지만 나는 이제 골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말 줄 안다.

쾌거다.

굼벵이에게는 구르는 재주가 있고 나한테는 골반을 돌돌 마는 재주가 있다.      


드디어 굼벵이랑 비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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