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녜녜 거짓말입니다.)
그 시절엔 별다른 유희거리가 없었다. 주말이면 작정을 한 채 사촌형제들과 팩게임을 하고, 비가 오면 굳이 우산을 들고 동네 보물찾기를 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봤다.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책가방을 현관 앞에 집어던지고 이미 한 장씩 분리되어 종이더미가 된 책을 펼치곤 했다. 딸이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아신 아빠는 매주 주말마다 날 서점에 데려가셨다.
"오늘은 한 권 골라."
"오늘은 아무 책이나 두 권 사 줄게."
아빠가 미션을 내리시면 나는 온 서가를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을 골랐다.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는 내가 책을 고르는 그 긴 시간 내내 한번도 나를 재촉하지 않으셨다. 다만 만화책은 금지였다. 그래도 슈렉의 고양이눈을 하고 조르거나 그 책의 유용성을 기똥차게 설득하면 가끔 사 주시기도 했다. 치열한 사투 끝에 얻어낸 만화책으로는 조선왕조 500년,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뚱딴지 시리즈 등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명작들이다.
아빠는 책을 사 주신 후 책 가장 앞장에 편지를 써 주시곤 하셨다. 예쁜 말을 고르고 골라 '아빠 딸!'로 시작하여 '사랑해'로 끝나는. 그 사이의 말들은 모두 '아빠 딸'에서 '사랑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아빠의 사랑에 도달했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나오면서 책에 미쳐버린 나는 급기야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고, 다음 시리즈가 나올 때까지 전 시리즈를 10번 이상씩 탐독했다. 해리포터가 완결이 난 후엔 김진명 소설로 넘어갔다.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어느 해 생일을 맞이하여, 마침내 나에게도 작은 핸드폰이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알고 보니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았다. 친구가 생기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후에 나오는 오다리 성적표마저도 기대되는 세상이었다. 방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장은 그럴듯한 장식품이 되었고 공부가 바쁘단 핑계로 서점에 가는 일은 줄어들었다.
입시를 지나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나는 마침내 독서와 완전히 이별했다. 술을 먹고 토를 하고 울고 사랑하느라 삶이 너무 분주했다. 그럼에도 서점엔 꾸준히 다녔다. 청각이 예민하고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서점은 완벽한 곳이었다. 한때 자주 다녔던 중고서점의 한 켠에는 카페가 있었다. 직원들이 입은 티에 적혀 있는 'Not Busy'라는 문구마저도 마음에 들던 곳이었다. 서점에서는 누구도 바쁘지 않은 편이 나을 터였다. 커피를 주문하면 함께 내밀어 주는 따뜻한 쿠키 한 조각도, 서가 사이를 옮겨다니는 느린 걸음걸이들도, 같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세어보는 시간도, 우연히 뽑아 든 책에서 옛 주인의 연필자국을 발견하는 일도 좋았다. 누구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지만 어떤 부탁이 없어도 한 걸음을 비켜서 주는 무언의 배려가 좋았다.
밥벌이를 해결하고 난 후에는 한 달에 한두 권 정도의 책을 사모으기도 했지만 어쩐지 끝까지 읽어내는 책은 여전히 거의 없다. 몇 주 전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자아성찰의 결과, 유명하다는 무슨 책 한 권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책 첫머리에 있는 <추천의 글>을 겨우 읽고 났더니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독자는 번역만 잘 해놓으면 알아서 봅니다.'라고 센 척을 한 후 넘겼더니 <들어가며> 차례다. 아니, 책을 몇 장이나 넘겼는데 아직도 안 들어갔단 말인가. 단숨에 넘어갔더니 이번엔 <서론>이다. 세상에... 내가 펼친 게 책이 아니라 마트료시카인형 전개도였던가. 나는 결국 <서론>이라는 글자 옆에 영혼의 묘비명을 세웠다.
'30대 현대인, 서론에서 잠들다.'
대충 올해 들어 완독을 실패한 17번째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마트료시카 구성을 증거로 무죄를 주장한다. 훌륭하신 분들은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서론에서 잠드는 병에 걸려버린 나의 유일무이한 충전기는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만 있으면 c타입 케이블이나 다름 없는 팔을 지나 몸뚱이가 절로 일으켜진다. 그러나 내 일상이 주로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과 함께 하더라도 소개팅에서 그걸 냅다 고백해버리기엔 민망한 면이 있다. 심심해 죽것는데 나도 연애라는 걸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소개팅에서는 주로 이름과 나이, 직장, 사는 곳 다음으로 취미를 밝히게 된다. (요즘엔 MBTI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순간에, '저는 주로 스마트폰 보면서 누워 있어요.'를 말하면 좀 멋이 없다. 그러니 나는 별 수 없이, '아, 저는 보통 쉴 때 글을 쓰거나(어느 정도 사실이다), 책을 읽어요.'라고 뻔뻔하게 '표지를요.'를 생략한다. 이 때 마침 소개팅에 나온 남자분도 독서를 좋아해서 '어떤 작가 좋아하세요?' 따위의 추가 질문을 한다면 그 분과는 영원히 안녕을 고해야 할 것이고, '와, 멋지시네요.'가 나오면 쑥스러운 듯이, 그러나 묘하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주제로 넘어가면 된다.
지금 남자친구는 다행히 후자였고, 어두운 곳에서 만나 내 미소에서 비릿함을 눈치채지 못한 죄로 나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본인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며 민망해했고, 나를 따라 독서에 취미를 붙여보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가 진짜로 독서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단 거다. 그게 왜 문제냐면, 언제인가부터 데이트를 할 때면 자꾸 카페에 가서 같이 책을 읽자고 날 들들 볶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700쪽에 달하는 코스모스를 읽어내고서 나에게 읽으라고 추천하며 날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응, 다음에. 를 연발하는 것도 한두 번, 내가 거짓말을 하긴 했을지언정 더 이상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 순 없었다.
"자기야, 사실 나 책 별로 안 읽어."
나는 애인 교환반품 기간이 지나자마자 뻔뻔하게 고백했다. 집중력이 바닥나서 호흡이 긴 웹툰도, 심지어 드라마도 보지 못하는데 책은 무슨 책. 남자친구는 가늘어진 눈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았고 난 '뭐 이제 와서 어쩔건데'를 장착한 눈빛으로 응수해줬다.
오늘은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개인적으로 심란한 일이 있어 남자친구와의 대화에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내가 고민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내 일에 관여하거나 충고를 하기보단 그냥 들어주는 사람인데, 내가 온종일 불안해하자 결국 나에게 '카페 가서 독서하기 형'을 내렸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라는 의미 같아서 나는 두말않고 1년 만에 남자친구의 제안에 응했다.
우리는 엄청나게 큰 대형카페에 가서 빵과 커피를 2만원어치나 사와가지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신이 산만하여 새 책을 펴진 못하고, 몇 년 전에 재밌게 읽었던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를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술술 넘어가는 글이 재밌어 금세 몰입해 읽었다. 읽다 보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면서 책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역시 글은 쉽게 읽히는 게 최고다. 그 책은 '독서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다 보니 나도 책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져 이렇게 나불거리고 있는 거다. 남자친구는 아까 읽다 만 책을 또 읽고 있다. 이 글을 올리고 난 후에는 미나리전을 부쳐 먹을 거다. 세상에. 독서와 글쓰기라는 '갓생'을 살아낸 후에 미나리전이라니.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하루다.
이 글도 오늘을 닮았다. 책으로 시작해 미나리전으로 끝나다니. 실로 완벽한 기승전결의 '갓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