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유지를 약속한 후 읽어주세요.)
이것은 고양이의 비위를 맞추다 갑자기 분통이 터져 쓰는 글로, 이 글의 초안을 다 쓰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음을 알려 둔다. 이 속도로 고양이의 만행에 대한 책을 쓴다면 집필기간은 나흘 정도면 적당할 거다. 브런치에 동영상 첨부가 가능한 걸 확인하고, 나는 친구에게 "가만두지 않겠어. 사회적으로 아주 냥망신을 줄 거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도 고양이에게 상처받고 있을 전국의 집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본가에서는 상도덕 없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라는 단어는 이미 '상도덕 없음'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본가에서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로 줄여 써도 무방할 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박을 각오하고 소신을 말하자면, 고양이의 ‘양’은 ‘양아치 양’이다. 당연히 양아치의 ‘양’은 ‘고양이 양’이다. 3000년 된 한문 박사님이 꾸짖을 갈을 외치며 지팡이로 나를 후려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모든 이름을 가명으로 적으니, 묘권을 존중하야 우리 집 고양이도 가명으로 적자면, ‘냄비’ 정도로 하겠다. 그 애의 얼굴은 밑바닥이 홀랑 탄 냄비랑 똑같기 때문이다.
냄비의 만행은 끝이 없다. 우선 그 애는, 아무리 삐까번쩍한 스크래처를 종류별로 사주어도 기어이 시몬스 침대를 스크래처로 애용함으로써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다. 식탁 의자는 진작에 해 먹었으나 마침 새 식탁세트를 사고 싶던 엄마에게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줌으로써 의문의 효도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킹사이즈 시몬스 매트리스는 너무 비싸다. 이 글을 빌려 부탁하건대 여덟 살이나 되었으면 이제 부디 갖다 바친 츄르값 정도의 효도 정도는 해주길 바란다.
냄비는 아침이면 엄마 발을 깨물어서 깨운다. 간식을 곁들인 신선한 조식을 대령하라는 거다. 나도 물려봤는데 진심을 담아 문다. 쌀알만한 이빨로 하는 패악질이 보통이 아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늦잠을 자고 있으면 옆에 가만히 앉아 얼굴이 뚫릴 때까지 쳐다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선이 뜨겁다. 냄비 눈이 돋보기라면 햇빛을 만나는 순간 엄마와 내 얼굴도 냄비처럼 까맣게 타고 말 거다. 그러니 엄마는 주말에도 늦잠을 주무실 수 없다. 미라클 모닝의 첫 번째 조건은 고양이다.
냄비는 우아하게 조식을 먹고서는 한참 동안 제 몸을 핥는다. 그럼 엄마는, 내가 고양이보다 세수를 덜 한다고 날 맹비난한다. 외출했다 들어올 때 "세이야~", 하지 않고 "냄비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위생관념까지 비교당하는 건 진짜 치욕적이다.
그러고 나면 그 애는 온갖 데에서 낮잠을 즐긴다. 햇살이 좋으면 캣타워에서 자고, 겨울에는 이불속에 쏙 들어가거나 소파에 깔아놓은 전기방석 위에서 잔다. 전기방석이 제법 널찍하니 반반씩 나눠 앉으면 좋으련만, 냄비는 귀신같이 방석 정중앙을 찾아 앉는다. 불판 한가운데를 찾는 건 냄비라는 이름의 본능인가 보다. 그럼 나는 거기 좀 끼어보려고 수작을 부려보지만 결국 한쪽 궁둥이는 차가운 가죽소파에 댈 수밖에 없다. 궁둥이크기 비례제를 제안해 보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냄비를 키우는 보람은, 저녁에 잠깐 느낄 수 있다. 도어락 소리가 들리면 기특하게 신발장까지 마중을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켜고 몸을 비비거나 드러누워서 배를 발랑 뒤집는다. 근데 거기 속아서 배방구를 시도하는 순간 자비 없는 네발차기를 당한다. 근데 신기한 건, 내가 도어락을 누르고 들어올 때면 50%의 확률로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본가에 자주 오지 않으니 내가 도어락을 누르는 속도가 낯선 건지, 현관 밖의 냄새를 맡는 건지 하여간 냄비가 가진 집사구별기술은 굉장히 용하다. 이 놈 자식의 머릿속에 나는 무엇인가 싶다. 아마 내가 지보다 세수를 덜 한다고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냄비는 아빠가 퇴근하신 후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에어컨이 빵빵한 큰방에 쏙 들어가 아빠의 손길을 즐긴다. 그러다 잘 시간이 되면, 코를 고는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방을 나와서 엄마 곁에서 잔다. 에어컨과 조용한 수면을 둘 다 즐기려는 계략이다. 그러나 그 일상루틴에 나는 없다. 작년에는 부모님이 휴가를 가셔서 나 혼자 집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애는 밤이 다 새도록 절대 내 곁에 오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나를 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곁에선 절대 잠들지 않겠다는 절개가 몹시도 대단해서 나는 마치 악독한 고을 사또가 된 기분이었다.
“야, 니 밥이랑 모래 다 내가 사주는 거거든?”
나는 악에 받쳐서 진지하게 내 공로를 얘기했는데, 안타깝게도 냄비는 세상엔 공짜가 없으며 밥과 노동력은 등가교환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기본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냄비를 사랑한다. 냄비가 자본주의의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간첩신고전화에 냄비 이름을 대지 않으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사랑을 하면 기록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냄비 사진을 많이 찍는다. 그러나 참치캔 표지에 있을 법한 고화질 증명사진은 찍을 수가 없다. 냄비는 나한테 좀처럼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의 상태는 대충 이러하다.
친구는 이 사진을 보더니, 이 정도면 그냥 길고양이를 지켜보는 수준이 아니냐고 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이것도 확대한 거라는 얘긴 하지 않았다.
고로 나는 그 애를 가까이서 보려면 마트에서 삼천사백 원을 써서 네 봉지짜리 츄르 정도는 사 와야 한다. 평소엔 츄르가 아닌 다른 간식을 주는 편인데도, 츄르 맛은 잊을 수 없는지 빨갛고 기다란 츄르껍질만 보면 정신없이 야옹거리며 내 뒤를 따른다. 근데 홍삼스틱이나 짜요짜요를 들고 있어도 그런다. 나는 냄비가 멍청한 짓을 할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낀다.
츄르를 쥐어짜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애는 즉시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날 1.5초쯤 응시하다 똥꼬를 보여주며 유유히 내 곁을 떠난다. 나는 그 애의 얼굴보다 똥꼬를 더 자주 본다. 그래도 츄르를 먹이는 건 낚싯대를 흔드는 것보다는 품이 적게 든다. 그 말은 곧 낚싯대를 흔드는 건 진짜 힘들다는 뜻이다.
냄비는 8년 전 어느 가정집에서 데리고 왔는데, 그 집에서 데리고 올 때 분홍색 낚싯대를 하나 받아왔었다. 그 낚싯대의 깃털이 볼품없이 빠지기도 전부터, 우리는 그 애를 기쁘게 할 온갖 장난감을 갖다 바쳤었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무슨 통 안에 뱅글뱅글 공이 갇혀 있는 것부터 긴 터널, 레이저, 찍찍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쥐 장난감과 새로운 낚싯대, sns에서 유행하던 미니당구세트까지, 뭐 셀 수가 없다.
그러나 냄비는 그 무엇에도 3일 이상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자, 이거 봐봐." 아무리 애타게 외쳐도 그 애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택배박스 안을 킁킁거리다 그 안으로 다이빙을 할 뿐이었다.
"멍청한 자식"
나는 새 장난감의 진가도 몰라 보는 냄비를 향해 외치곤 했지만, 사실 진짜 멍청한 자식은 멍청한 고양이를 위해 삼만 원짜리 박스를 산 나였다. 이쯤 속았으면 그냥 아무 박스나 줄 때도 됐을 텐데 굳이 굳이 몇 만 원짜리 장난감이 담긴 박스를 대령한다.
냄비가 꾸준히 가지고 노는 거라곤, 새끼 고양이 때 가지고 놀던 그 분홍낚싯대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울이 크고 깃털이 알록달록해도 다른 낚싯대엔 요지부동이었고, 다 뜯어진 분홍 낚싯대를 물고 와서는 내 앞에 툭 던져놨다. 흔들라는 거였다.
괘씸한 건, 손 바로 옆에 던져주면 될 걸 항상 애매하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던져놓는다는 거였다.
손을 뻗으며 “가까이 좀 가져와봐.”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한 번도 내 말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이건 그 증거영상이다. 냄비는 저 깃털 대가리를 물고 질질 끌어와서, 반드시 내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던져놓고
내가 흔들 때까지 부담스럽게 쳐다본다.
아, 이 까다로우면서도 일편단심 해바라기 같은 자식.
냄비가 이렇게나 한결같으니 결국 나는 새 장난감에의 로망을 버리고 그 낚싯대와 똑같은 낚싯대를 검색했다. 집사는 나대봤자 집사다. 결국 건방진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게 내 존재의 이유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고양이 낚싯대가 너무 많았다. 검색 방법은 포털 사이트 쇼핑탭의 1페이지부터 샅샅이 뒤지는 것뿐이었다. 난 그걸 결국 찾아냈고, 새 걸로 사주었다. 깃털이 복실하게 달린 낚싯대를 보며 냄비는 신나게 점프했다.
문제는, 낚싯대는 영원히 쓸 수 없고, 나는 별로 치밀하지 못하단 거였다. 낚싯대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그때 그 업체를 저장해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다시 포털 사이트의 1페이지부터 찾는 수고를 반복했다. 두 개를 사면 그 공백이 두 배로 늘었고 세 개를 사면 세 배로 늘었으나 어쨌든 나는 늘 똑같은 과정을 또 거쳤다.
'어차피 다시 살 거 알면서 어디 메모 좀 해놓지. 멍청한 기지배.' 나는 늘 과거의 나에게 욕을 했다. 그러나 아마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자기를 욕할 걸 알았기에 그걸 메모해놓지 않았을 거다. 내 고양이 양육 역사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도와가며 부지런히 신세를 망쳐 온 과정이다.
불과 며칠 전, 나는 또다시 포털사이트를 뒤졌으며 새로운 낚싯대 두 개를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멍청하게 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그 애를 무시하고 비닐 안에 들어있는 통통한 낚싯대를 꺼냈다.
음~ 8년 동안이나 봐 온 분홍색 깃털. 아주 지긋지긋하군.
북실북실한 새 깃털에 냄비도 기쁜지, 여덟 살쯤 먹고서는 잘 하지도 않던 점프도 했다. 드러누워 팔만 휘적대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근데 한, 3cm쯤 뜬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드러누워 팔만 휘적대던 모습이랑 별 다를 게 없다. 근데 너무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에 쿠쿠쿵 하며 웃었다. 쿠쿠쿵하고 웃었다는 건, 그 애 자존심이 상할까봐 우하하 하고 웃진 않았단 뜻이다. 내가 이렇게나 사려 깊은 반려인간이다.
그러나 내가 자기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냄비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또 홱하고 똥꼬를 내민 채 사라지는 거다. 저놈의 똥꼬에 방탄소년단 포토카드라도 붙여놔야 내 기분이 덜 상할까 싶다.
똥꼬를 보지 않기 위해선 낚싯대를 흔들 때 그냥 흔들면 안 된다. 열과 성을 다해 무속인처럼 흔들어야 한다. 방울 소리가 달랑달랑 울리도록, 그래서 이러다 신이 오든 옆집 고양이가 오든, 누가 하나 더 오겠구나 싶을 때까지 흔들면 된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내 무릎에 한 번도 앉아주지 않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그러나 원래 뒷담화는, ‘그래도 뭐 나쁜 사람은 아니지’로 끝이 나야 제 맛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말로 입에 묻은 죄를 씻어내곤 하니까. 우리 냄비 뒷담화를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칭찬도 해 보자면, 그래도 우리 냄비는 의리가 있고 제법 사냥도 잘한다.
언젠가 부모님이 들어가 주무시던 때였다. 나는 새벽까지 TV를 틀어놓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거실은 밝고 집안은 어두웠다.
한참을 뒷베란다에 있던 냄비가 주방을 거쳐 나에게 ‘달려’ 왔다. 별 일이었다. 그런 일은 내가 츄르를 들고 있을 때나 간식서랍으로 걸어갈 때 빼곤 없다.
"오이구! 우리 냄비! 언니한테 와쏘오!"
나는 손녀를 맞이하는 할머니처럼 두 손을 벌렸다.
그런데 냄비가 다가올수록 뭔가 이상했다. 수염은 코 옆에 달려있는데, 입 옆에도 수염이 달려 있는 거였다.
응?
난 그걸 자세히 봤다. 냄비는 드물게 내 옆까지 와서 입을 벌리고 뭔가를 퉤 뱉었다.
뭔가 새까맸다.
바퀴벌레였다.
으아앜!!!!
나는 비명을 지르며 엄마에게 뛰어갔다. 냄비는 내 비명소리에 놀라 어디론가 사라졌고 주무시던 엄마도 왜왜! 하고 덩달아 소리를 지르셨다.
“벌레! 벌레! 바퀴벌레!”
부모님은 그걸 처리하셨다. 냄비는 삐져서 뒷베란다에 숨었다.
“냄비야, 미안해 놀랐지? 미안해 이리 와”
냄비는 오지 않았다. 제 딴에는 거의 처음 그럴듯한 사냥에 성공했으니 자랑을 하고 싶었거나 선물을 하고 싶었거나 뭐 그랬을 거다.
의기소침한 냄비는 엄마가 야식으로 열심히 달랬다. 그 애는 그 이후로 나를 잘 째려보곤 한다.
생각해 보면 선물의 대가로 비명과 줄행랑은 좀 도리에 어긋나긴 한 거 같다.
아, 쓰다 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네.
고양이는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