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글씨 Jul 13. 2020

인문학 공부를 왜 해?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했습니다.

졸업을 3개월쯤 앞둔 막 학기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의 연구실로 호출을 받았다. 교수 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만난 우리 학년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깊은 분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터라 아무래도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계획이 궁금하셨던 것 같다. 

취업에 대한 나의 고민에 교수님은 내 취업의 불안전함과 어려움에 대해 가장 걸림돌이 될 부분을 알려주셨다. 국내 대기업 인사팀에서 근무하다 교수가 된 분의 이야기였지만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후 취준생 시절 그 기업에 면접을 보게 되었고 이는 정말 걸림돌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의 내가 들은 말은 대략 이러한 맥락이었다.


"네가 취업이 어려울 수 있는 건 지방대를 졸업해서가 아니라 여자라서야."


그러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그 뒤에 어쩌고 저쩌고 따라온 것 같긴 한데, 사실상 취업에 관심도 없던 무려 대학교 4학년이나 된 나는 그 말이 그렇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나는 꿈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내고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대기업쯤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착각이 있었다. 사실상 그렇게 가고 싶지도 않기도 했다. 왜냐면 대기업에 취업하는 건 어쩐지 멋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멋!) 여차저차 취업과 미래를 이야기하며 지역의 한 기업에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절했다. 막연히 취업을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졸업을 앞둔 제자가 취업이 싫다니, 졸업 후 계획을 묻는 교수님의 질문에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다. 반색을 하며 대학원에 올 생각이냐는 교수님께, '아니요 저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대답을 했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경영학을 전공하던 애가 취업은 싫고 철학이 하고 싶다니 답답한 소리였을 만 했다. 


당시의 나는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냥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가 가짜 공부라는 건 아니다. 다만 정해진 답을 학습하는 공부가 아닌 생각을 만들고 나누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진득하게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토론하고 그 문제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원래도 무형의 어떤 것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사랑의 정의나 죽음의 관점에 대해 나와 다른 시선과 사고를 가진 사람과 마치 싸우나 싶은 듯이 토론하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나는 이야기가 좋았고,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좋았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냥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마침 몇 번의 면접과 논술시험만 통과하면 꿈꾸던 공부를 할 수 있는 (그것도 무상으로!) 곳이 있었다. 막연히 철학이 도전해보고 싶은 어디쯤 아닐까 하는 것과 다르게 이 곳에서의 공부는 커리큘럼이 명확했다.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을 아울러 고전을 읽고 이에 대한 토론을 한다니! 졸업을 앞둔 몇 달 전 그곳을 발견한 건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빠른 년생으로 같은 학번 친구보다는 실질적인 나이가 한 살 어리기도 했고 휴학 한번 하지 않았으니 1년을 오롯이 하고 싶은 공부에 쓰는 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졸업 후에 무엇을 하더라도 남들보다 늦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런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 취업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인문학 공부를 해서 무언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철학 혹은 그 외 전공으로 대학원을 간다거나 1년 정도 공부 후 어떤 분야로 진로를 결정해야겠다는 그다음이 없었다. 혹시 합격하지 못하면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플랜 B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모했지만 순수했다. 만약을 대비한 경우의 수를 고민하지 않고 온전하게 현재만을 생각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는 단순히 사람이 궁금했고, 더 많은 세상의 사람을 알고 싶었으며 그 기회가 그곳에 있다고 믿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다음의 내가 보일 것만 같았다. 1년 후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어떤 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도 있었다.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짧았던 한 달 간의 취업 스터디 동안 몇 번 낸 이력서는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느 기업에 지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쓴 지원서는 몇 번이고 수정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재밌고 즐거웠다. 누구나 바라던 기업의 일자리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간절했던 자리에 합격의 기쁨을 안고 2015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2015년 3월, 그토록 바라 왔던 인문학 공부를 시작으로 어디선가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사회적 신분은 백수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전 01화 4년 8개월의 백수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