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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글씨 Aug 24. 2020

그곳에 나는 없고,

플라톤도 공자도 될 수 없지만..

2019년 여름, 한 기업의 면접에서 만났던 면접관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 아니 도대체 그 활동을 왜 했습니까? 그게 정말 본인 인생에 도움이 되었나요? "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공적인 취업을 위한 대외활동? 서류나 면접에 프리패스하는 스펙? 통념적으로 번듯한 기업에 일자리를 얻어내는 일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졸업 후 내가 해왔던 활동의 대부분은 인생에 도움되는 일은 아니었다. 인문학 공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 엄청난 진리를 깨우치는 현자가 되고 지혜를 가지는 그런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플라톤과 막스 베버, 공자와 맹자를 읽은 것만으로도 마치 현 정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어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준의 수사학을 획득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건 완전한 나의 착각이었다. 기대만큼이나 고전을 읽고 토론을 하는 것은 정말로 미치도록 재밌고 짜릿했다. 수업시간이 부족해 밥을 먹는 시간과 식후 쉬는 시간조차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의견을 내고 토론하는 현장에 내가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게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지적 허기인지 허영심인지 모를 것들을 끊임없이 갈망했고 이는 늘 부족함 없이 채워졌다.


신기한 건 채우면 채울수록 모르는 것만 생겼다. 내가 이 세상에 알고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1년간 공부를 하며 알게 된 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세상에 공부해야 할 것이 정말 넘치게도 많다는 것이다. 아, 하나 더 있다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원전 몇 세기에 쓰인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배운 것이다. 1년의 시간 동안 진짜 배움은 따로 있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 나와 같이 1년을 버리고(버린다는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취업을 하는 데 있어 꽤나 위험성이 있는 활동임을 감안하여 용기를 내었다는 의미) 이런 곳에 시간을 쏟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신이 났다. 그들은 내 예상보다 더 대단하고 훌륭했으며 멋있었다. 국내외 유수의 명문대를 다니는 것은 그들이 가진 대단함이 아니었다. 내내 감탄했던 것은 배움에 대한 태도와 열정이었다. 마감기한에 맞춰 허겁지겁 글을 써내는 나와 달리 밤새 쓴 글도 내키지 않으면 과감히 삭제하였고, 새벽 2시가 넘어가도록 책장을 넘겨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고, 공부가 아닌 모든 일에도 늘 열과 성을 다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았다. 그 반짝거림을 나도 가지고 싶었다.

 

1년의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며 나는 우쭐했다. 어렵다는 철학책을 읽으며 수십 편의 글을 썼단 사실이, 누구나 선망하는(이것 조차도 허상적인 생각이지만) 미국의 수도에서 인턴을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게 나를 대변한다고 믿었고 곧 내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 타이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내가 무엇이라도 된 것 같았다.  

 졸업식 날 단상에 올라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이 곳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저 철학책을 읽었고, 미국을 다녀온 나였다. 그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내가 이 반짝이는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는 나는 오롯한 내가 되어야 한다. 내가 되어야만 당당히 이 곳에 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3살에는 무엇이라도 될 줄 알았다는 말에 네가 되어야 할 것은 너라고 이야기하는 청춘 스케치의 대사처럼, 나는 그저 내가 되어 살면 된다. 그게 어떤 형태일지라도.



인문학을 공부했다 했지만 사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밤이 새도록 읽어내고자 노력했던 플라톤도 공자도 여전히 잘 모른다. 다만, 인문학 공부가 인생에 도움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한다. 특별한 내가 아닌 그냥 내가 되고자 마음먹게 되었으니까. 세상에 셀 수 없을 만큼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인생이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플라톤을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나는 겨우 플라톤의 [국가]를 한 권 읽었을 뿐이고, 읽었다고 모든 걸 이해한 것도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다. 인생은 바뀌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가끔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되었고(어디까지나 척이며 먹히지도 않지만..), 소중한 친구들을 얻었으며 이로서 조금 더 재밌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곳에 내가 찾던 혹은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없었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어떤 곳에도 무엇의 특별한 나는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있는 곳에서 그냥의 내가 되면 된다. 진부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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