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쓸모가 되어야만 하는 삶에 대하여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머물고 싶었다. 몽골 여행은 말 그대로 사막에서 무료하게 앉아 별을 기다리고, 흩날리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침 뱉는 낙타를 보는 일이라고 했다. 생각을 정리할 무료함이 필요했다.
비포장 된 도로를 5시간 내리 달려도 바깥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5일째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모래만 가득 쌓인 곳이 사막일 줄 알았는데, 꽤나 다채롭다. 동시에 단조롭다. 몇 가닥의 풀과 돌, 사막은 척박한 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을 가졌다. 나무 한그루를 찾기 힘들고 풀이 뒤 덮인 초원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다만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만 존재한다. 농사를 짓거나 건물이 지어지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쓸모'를 가진 땅이 아니다. 그저 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몽골에 가기 전 자주 듣는 팟캐스트에 해외 특파원으로 몽골에 거주하며 사막화 방지 운동을 하는 분이 출연했다. 3년째 사막에서 나무 심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처음 이틀간 평야를 달릴 땐 언젠가 이 곳도 푸르른 숲이 되겠구나, 100년 뒤쯤엔 어떤 모습일까 상상했다. 어쩌면 아마존을 버금가는 밀림이 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더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풍경을 보는 게 마냥 지루하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사막의 미래를 숲으로 상상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달려도 달려도 끝나지 않는 땅들을 보며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다섯 발자국 걷기가 힘든 좁디좁았던 자취방을 지나, 회사를 다닐 적 모니터 두 개로 가득 차 옆으로 시선을 돌리기 조차 힘들었던 책상도 지났다. 내 것이라고 이름 붙어져 허용된 자그마한 공간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답답하다 생각했었는지 모를 당연한 사실들을 상기하며 아주 멀리, 지구의 끝까지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막이 어쩐지 자유로이 느껴졌다.
어쩌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이 드넓은 땅, 모래에 푹푹 발이 빠져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척박한 땅의 역할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시간의 흘러감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 오직 그 일을 온전히 해내는 것. 우리가 억지로 지어 올리고 쌓아 올린 형태가 아닌 태초의 모습, 지구의 민낯이었다. 태초에 태어나길 숲인 곳이 있듯 당연 스레 사막으로 태어난 곳도 있다.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겨 거처를 옮기는 유목민들이 있고,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도 자라난 꽃들이 있다. 그곳에 본래부터 살고 있던 생명들은 잘 살아내고 있다. 사막이 숲이 되길 원한 것은 그곳 밖의 사람들이다. 사막은 숲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광화문 교보문고 현판에 걸린 정희성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숲이고 싶었다. 울창한 밀림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숲이 되면 좋겠다 했다. 함께 서서 반짝이는, 생명력을 뿜어내는 숲이 되고 싶었다. 숲이 되어 쓸모를 가지고 싶었다. 그대와 내가 왜 숲이 될 수 없는지, 우리의 간격이 너무 가깝거나 멀어서인지 오랜 고민의 답은 어쩌면 나는 본디 사막으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척박한 자연의 땅, 그곳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생명들은 살아간다. 우리가 숲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는 숲이 될 이유가 없어서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