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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Aug 20. 2024

곡성 관음사 이야기(3)

- 창건설화와 심청전의 원류 이야기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는 백제 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 관음사가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에 있는 관음 성지이자 백제 시대 사찰로는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이곳에는 5개의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로 이들 이야기는 심청전의 원류가 되는 이야기이면서 관음사 창건 설화인 이야기다.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1729년 간행된 '성덕산 관음사 사적기'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 사적기는 조선 영조 5년에 관음사 장로 우한자 스님이 백매자 선사에게 들은 창건 유래를 다듬은 내용으로, 관음사 원통전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 기록 등을 포함하고 있다.     



관음사 창건설화에는 '심청'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대흥현에 살았던 맹인 원량과 그의 딸 원홍장이 주인공이다. 원량은 일찍이 부인을 잃고 가난하게 사는데 의지할만한 일가친척도 없고 오직 홍장이라는 어린 딸 하나가 있었다. 홍장은 날 때부터 날 때부터 얌전하고 예뻤으며 몸가짐도 범상치 않았고 성품이 어질고 지혜로워 맹인 아버지를 늘 지성으로 섬겼고, 봉양하는데, 뜻이 간절하여 새벽이나 밤이나 누워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 좌우에서 손발이 되어 보살폈고 의복의 마련이나 음식을 맛보는 것까지 조금도 불편 없이 해드렸다. 그리하여 주위에서 모두 큰 효행을 칭찬하게 되니 그 이름이 중국 땅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원량은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홍법사 법당을 중건하고자 권선차 나온 화주승 성공스님이었다. 성공스님은 맹인을 보자 달려와 절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영원히 남을 만한 불사를 이룩하고자 하니 나에게 큰 보시를 해 달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원량은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자 해도 어렵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다시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소승이 화주하러 나오기 전날 밤 꿈에 부처님께서 나타나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일 아침에 길 입구에서 반드시 맹인을 만날 터인데 그가 곧 너의 큰 시주자가 될 것이라’ 하셨으므로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원맹인은 한참 생각하면서 가다가 대답하기를 “집에는 곡식 한 말도 없고, 들에는 한 뼘 땅도 없으니 비록 시주하고 싶다고 한들 어찌하겠소. 다만 내게 어린 딸 하나가 있는데 이를 드릴 터이니 넘겨서라도 법당을 짓는데 좋은 시주로 삼아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열여섯 홍장은 아버지를 위해 성공스님을 따라나서고, 그 과정에서 소랑포에서 쉬다가 진나라에서 배를 타고 오는 사신을 만나 황후로 맞아들여지게 된다. 중국 진나라에서는 황후가 돌아가서 황제가 슬퍼하던 중 꿈에 신인이 나타나 동국 백제에 황후가 될 사람이 있음을 예언하고 맞이하라는 현몽을 하게 되어, 분부를 받들어 배 두 척 가득히 예물을 갖춰 오던 중이었다. 놀라던 홍장은 폐백의 물건을 모두 성공스님에게 주고 진나라로 가서 황후가 되었다.      



홍장은 맞이한 황제는 수려한 용모와 귀품있는 모습에 만족하고 황후로 맞이한다. 홍장은 진나라에서 황후로서의 덕과 지혜로 칭송받으며, 마노로 삼천 탑을 조성하여 여러 나라에 나누어주고 불교 공덕을 쌓고, 본국 백제를 위해서는 오십삼 불과 오백성중과 십육나한 등을 조성하여 보내는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공덕을 베푼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원불로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조석으로 발원하여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사무친 마음으로 석선(돌배)에 실어 띄워 보내면서 서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인연 따라 제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을 닦아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 주소서..." 하는 원력을 세워 배를 띄웠다. 또한 이 불상을 따라가다가 머무르는 곳에 봉안하라고 명을 내린다. 이 배는 표류해 가다가 지금의 낙안군의 벌교 홍교 곁에 정박하였는데 군사가 외국 배임을 알고 다가가면 스스로 움직여 바다로 나아갔다.    


 

이튿날 옥과(현,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이름이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우연히 바닷가에 나와 홀로 서서 먼 곳을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에 구름과 파도가 아득한 가운데 하나의 작은 돌배가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성덕은 배 위로 올라가 금상 관세음보살을 받들어 뵙게 되니 홀연히 공경심이 일어나 몸을 굽혀 예배한 다음 관음상을 몸소 업고 일어나는데 가볍기가 마치 기러기 털과 같았다. 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이 고개에 이르러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바로 멈춰 관음상을 안치하고 대가람을 지어 편액을 성덕산 관음사라 걸었다.      



성덕은 나무를 꺾어 움막을 만들어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관음사(觀音寺)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봉행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 산 아래에 사는 촌가의 사람들이 나무하러 산에 와서는 이 광경을 보고 자기들도 관세음보살님께 예배하며 마음속의 소원을 빌면 모두가 성취되는 기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소원이 하나같이 이루어지므로 관세음보살님의 영험(靈驗)스러움이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되니 찾아와서 예불 기원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구름 같았다.     



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주산(主山)을 성덕(聖德) 아가씨의 이름을 따서 성덕산(聖德山)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開山祖)가 되고 또한 창건주(創建主)가 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니 성덕산(聖德山)은 백제 이래로 수천 년 동안 내륙에 있어서는 유일한 관음영지(觀音靈地)로 이어져 내려와 정유재란 전까지만 하여도 80여 동(棟)의 건물을 자랑하였으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널리 홍포(弘布) 해 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관음보살상이 국군의 방화로 안면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홍장이 떠난 후, 그의 아버지 원량은 관세음보살의 힘으로 시력을 되찾고, 천수를 누렸으며, 성공스님은 홍장의 시주 덕분에 불사를 환희로 마무리한다.      


          

이 이야기는 성덕이라는 여인이 관음상을 모시고 성덕산 관음사를 창건한 설화와 홍장이라는 효녀의 효심과 불심을 나타낸 설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 홍장의 설화는 나중에 효녀 심청전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홍장과 성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였다.     


     

참고로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황후는 황태자로 하여금 고향 백제 땅에 탑을 조성하게 하여 금강사(金剛寺)에 모셨으며 또 풍덕현(豊德縣 : 현재 京畿道 開豊郡) 경천사(敬天寺)에도 모셨다고 한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다시 찾아와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모셔져 있다. 그러나 감로사, 금강사와 경천사의 연기 설화는 사라졌거나 그 사적이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있다.        



            

출처: 

1. 블로그 https://phd88.tistory.com/798 )

2. 김희태(남도불교문화연구회), 곡성 관음사의 기록유산, , 불교문화연구, 12권, 45-116(2014.12)

3. 오마이뉴스 기사, https://omn.kr/1e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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