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조카에게 인생을 배우다 by 믹서
조카 이야기부터 할까 한다. 나의 첫 조카 윤이는 올해 아홉 살이다. 방과 후 학교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한바탕 신나게 뛰어놀아야 직성이 풀릴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다. 최근에는 아이돌 댄스에 빠져서 가족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대를 만들어 춤을 선보인다. 아기 때부터 목소리도 우렁차서 노래를 시켜야 하나 생각했었는데, 커갈수록 노래뿐 아니라 춤, 피아노 등 여러 분야에서 열정이 넘치는 윤이를 바라보는 내 눈에서는 꿀이 떨어진다. 윤이 장단에 맞추어 에너지를 쏟은 날에는 몸은 지쳐도 마음엔 활력이 돋는다.
다른 아이들도 윤이처럼 활달한지 궁금해서 동생한테 물어보니 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줬다. 윤이와 베스트 프렌드인 연이가 함께 어딜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윤이가 “ㅇㅇ으로 가요~~ 고고씽~~!”이라고 외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걸 보고 연이가 “윤아~ 그건 좀...”이라며 윤이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웃겨서 깔깔댔다.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고고씽’을 외치는 윤이의 모습은 나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윤이의 고고씽 사건을 들은 이후로 나도 모르게 윤이를 따라 하게 된 것이었다. 마트에 가기 전에 “우리는 마트에 간다아~~ 신나게 나가요오~~”, 일하러 갈 때 “앗싸! 촬영 나간다~ 고고씽!”, 식당에 갈 때 “우와~ 밥 먹는 시간이다! 아싸라비아~ 맛있는 밥 먹으러 가요~”라고 외치며 오두방정을 떤다.
남편 Y는 그런 내가 재밌는지 엄청 웃는다. 그런 분위기로 외출을 하면 둘 다 기분이 업 돼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가끔 길거리에서도 그러는데, 누가 보거나 말거나 우리만 좋으면 된 거 아니냐며 킥킥댄다. 이게 다 윤이를 따라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서 저녁을 차려 먹는데, 식탁에 앉은 내가 Y에게 앞접시를 하나 달라고 했다. Y는 내게 “너 진짜 앞접시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식사할 때 꼭 음식을 앞접시를 놓고 야금야금 먹는 걸 좋아한다. 앞접시가 있어야 밥 먹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Y의 말을 듣고 ‘내가 앞접시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할 때 주방에 있는 Y에게 말했다.
“오빠! 내가 좋아하는 거 줘~”
그랬더니 Y가 떡 하니 앞접시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뒤 설명 없이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걸 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Y는 그걸 알아듣고 앞접시를 식탁에 대령했다. 세상에! 그 순간 완전히 신나 버린 나는 앞접시를 들고 춤을 추고 말았다. “앞접시! 앞접시! 만세!”를 외치며 정체모를 댄스에 빠져 버린 나를 보고 Y는 배꼽 빠지게 웃었다.
앞접시 사건 이후로 앞접시는 곧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이 됐다. 김춘수의 <꽃>처럼 말이다.
Y가 앞접시를 불러주기 전에는
앞접시는 다만 하나의 접시에 지나지 않았다.
Y가 앞접시를 불러주었을 때
앞접시는 나에게로 와서
완전 소중한 그 무엇이 되었다.
윤이를 따라 하다 보니 일상이 바뀌었다. 별일이 없어도 활력이 넘쳤고, 앞접시 댄스로 식탁은 늘 화기애애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고고씽! 가즈아!”를 외치니 신이 났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라며 부르짖었다. 언어의 힘이 세다는 걸 새삼 느꼈다. 말하는 대로 기분이 좋은 쪽으로 바뀌는 걸 경험하게 된 것이다. 윤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인생 활기차게 사는 법을 아홉 살 조카에게 배웠다.
이런 일이 거의 세 달 째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 앞접시 댄스 같은 일은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고 해야 할까. 재밌고 신기한 삶의 변화여서 Y에게도 권했다.
“오빠도 오빠의 앞접시를 찾아봐. 오빠가 일상에서 좋아하는 걸 발견해서 나처럼 열광하면 인생이 달라져! 오빠의 앞접시는 뭐야?”
Y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마음의 문이 닫혀서 그런 것 같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앞접시에는 함께 열광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앞접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앞으로 같이 찾아보자고 말하며 Y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마흔이 넘으니 현실은 점점 더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일도, 관계도 여전히 어렵고 점점 세상이 낯설다. 이제 반 정도 살았는데, 남은 인생을 또 어떻게 잘 살아나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하다. 그런 반면, 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인생은 짧게 느껴진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삶은 버겁기만 하다.
이런 시기에 조카 윤이의 에너지는 내게 선물이 됐다. 사소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열광해 보니 알겠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하루를 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 Y도 꼭 Y만의 앞접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