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어버이날 단상
어버이날은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특별히 감사하는 날이다. 이 시대에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론 무엇이 있을까. 학생 때는 의무적으로 카드나 편지를 썼다.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 쓰는 시간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보통 돈으로 하려고 한다. 옷이나 신발, 가방 같은 걸 사려고 해도 취향이 확실한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어려우니, 어버이날 선물 생각만 하면 피곤해진다. 결국 속 편한 방법을 택한다. 돈 봉투.
올해는 동생이 엄마 아빠를 위해 뭔가 살 생각을 했는지 내게 전화해 의견을 물었다. 나는 까다로운 엄마 아빠 생각에 그냥 현금으로 하자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엄마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전화로 물었더니 “지금 가방이 좀 작긴 한데…”라고 했다. 원하는 가방의 크기, 디테일 등 설명을 들었으나 조건 맞는 가방을 고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우리가 드리는 돈으로 추후에 엄마가 직접 가방을 사는 걸로 합의를 했다. 전화를 끊고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께 무엇을 드릴지 고민하는 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남아서였다. 바로 어린이날! 양가에 조카가 네 명이나 포진해 있는 우리에겐 꽤나 어려운 숙제가 어린이날 선물이다. 조카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언제부턴가 어버이날보다 어린이날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혼으로 인한 가족의 확장으로 양가 부모님, 양가 조카들을 다 챙겨야 하니 아이가 없는 우리에게도 5월 초는 제법 바쁘다. 내 동생의 자녀 9살, 7살 남매에게 우리 부부는 고모 고모부 그리고 오빠 동생의 자녀 7살, 5살 자매에게는 큰엄마 큰아빠다.
보통 어린이날 당일은 조카들이 자신의 부모님들과 지내도록 하고, 차후에 우리가 조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조사하여 선물하는 식이었다. 올해는 오빠 동생네 두 조카는 다행히 원하는 물건이 확실히 있어 온라인 주문으로 해결했다. 남은 건 이제 내 동생의 두 자녀를 위한 선물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뭘 사줄지 고르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조카들의 니즈 조사가 늦어진 것이다.
지난 주말, 어린이날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아이를 만나게 됐다. 미안한 마음 가득 안고 일단 부모님과 다 함께 만나 외식을 하러 식당에 갔다. 우리 부부가 약속 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의자에 앉았는데 조카 1호가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뭐가 있나?” 하고 둘러보니 식탁에 글씨가 쓰인 종이가 있었다.
“고모 사랑해요.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이 편지를 드립니다. 축하해요.”
순간 울컥했다. ‘축하해요’라니!
작년 어버이날에 조카들이 우리 엄마 아빠께 드린 종이 카네이션과 감사 편지를 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살뜰히 챙기는 조카들이 대견했다. 그러나 고모인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을 거라고 기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와우! 근데 올해 어버이날에 9살, 7살 난 조카들이 고모에게 축하를 보냈다. ‘사랑한다’는 말도 감동스러운데 ‘축하한다’는 말은 감동 그 이상이었다.
이 아이들은 고모 생일에 매년 카드를 써 주는 성실하고 사랑스러운 조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어버이날 편지는 더 특별했다. 이 고모에게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안겨준 조카들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좀 더 자랑을 하자면, 올해 어버이날에는 오빠 동생의 자녀들에게도 그림 편지를 받았다. 블링블링한 일곱 살 소녀는 큰엄마에게 편지를 전달하기가 매우 부끄러웠는지 제 엄마를 앞세웠다. 수줍게 편지를 내미는 조카는 그 자체로 ‘사랑’, ‘감동’이었다.
“큰엄마 큰아빠 사랑해요. 감사해요”라는 문구가 담긴 편지에는 조카가 손수 그린 그림도 있었는데 나와 오빠 얼굴 옆에 우리의 반려묘 리앙이와 랭이도 있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어린 조카에게도 리앙이 랭이는 큰엄빠와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인식이 확실히 있었나 보다. 리앙이 랭이는 이미 작은 아빠 작은 엄마에게 조카로서 당당히 인정받아, 매년 어린이날에 맛난 츄르를 선물 받는다. 몇 해 전 우리 시어머니는 리앙이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용돈을 주신다고 선언하셨는데, 아직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있어 아쉽다.
아무튼 큰엄마로서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감사 편지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아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장난감을 주는 게 다지만, 앞으로 커갈수록 원하는 물건들도 달라질 텐데 큰엄마로서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고모로서도 마찬가지다. 크게 역할을 하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동생 가족과 만날 때마다 주로 동생 부부와 이야기 나누기도 바빠 제대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지 못해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만났을 때는 어린이날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나 더 미안했다. 날이 저물고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는데 2호 조카가 내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고모,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응. 알았어!”
지금 당장 놀러 간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 아이는 자기네 집에 곧장 내가 간다는 말로 들렸나 보다. 앞에 가는 제 누나를 목청껏 불렀다.
“누나! 고모가 우리 집에 놀러 온대!”
“와 진짜? 신난다!”
두 조카는 너무 행복해했다. 거기에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간다고~”
순간 두 아이는 실망했다. “고모는 맨날 나중이래!” 입이 비쭉 나온 2호 조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장난감이나 옷이나 신발이 아니라, 고모 고모부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걸 말이다. 올해 어린이날 기념으론 시간을 선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비록 이미 어린이날은 지나가 버렸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조만간 날을 잡아 아이들 데리고 공원에라도 나가야겠다.
이래저래 이번 어린이날, 어버이날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어버이날의 ‘어버이’에 고모 고모부나 큰엄마 큰아빠의 자리도 조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모가 되지 않았지만, 고모 큰엄마로서 역할과 책임감을 고민했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고모 고모부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고, 이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에 한 번, 부모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은 돈봉투를 드리기 전에, 우선 자녀와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올해 어버이날 기념으로 함께 식사할 때 양가 부모님 모두 하신 말씀이 같았다.
“이런 시간 마련해 줘서 고맙다”
어버이날과 어린이날이 되면 맨날 “이번엔 어떤 선물해야 되는 거야, 휴...”라며 골치 아파했던 나를 반성한다.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다시 생각하게 한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