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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Feb 22. 2022

휴식의 관성에 대하여

비효율적인 삶을 살아보는 일

너는 어떻게 제주도에 와서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냐



머리맡에 핸드폰 알람을 두세 개씩은 걸어두고 자던 지난날이 이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잠들기 전 핸드폰은 거실에 있는 콘센트 충전기에 꽂아두고 어떠한 기기도 없이 깜깜한 침실로 걸어 들어간다. 더 이상 우리 가족(나에게)에게 알람이 깨우는 아침이 없기 때문이다. 커튼 사이로 해가 비추고 잘 만큼 잤다 싶으면 일어나는 아침은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도 지속된다. 일에 종속된 삶 속에서의 일주일 패턴은 달려야 하는 5일과 달리기 위해 준비하는 2일만 있었뿐이였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 일주일치 요일의 의미는 사라졌다.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늦은 시간에 부스스 일어나 이불을 꽁꽁 두르고 그대로 침대 옆 창문을 열어젖힌다. 이 느긋하고 관대한 아침의 풍경에 어떠한 죄책감도 묻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꽤 놀랐다. 내가 나 자신에게 이토록 관대한 매일이, 내가 게으름을 혐오에 찬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지금이 낯설고도 신선하다. 워킹맘으로 살아온 6년 동안 시간에 쫓길수록 지독히도 시간에 집착했다.









일과 육아에 지쳐가며 자아가 흩어지는 우울한 감정을 가족과 친구에게 넋두리를 하는 것보다 동일한 환경 속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결이 비슷한 온라인 존재들에게 찾았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새벽 기상을 하며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성장을 추구하고, 나만의 시간이라는 그 관념적인 위로를 쫓았다. 글쓰기에 흥미를 붙였고, 자연히 독서에도 열을 올렸다. 신체적 건강이라는 운동과 자기 계발을 위한 영어 공부도 성장의 주요 요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시간에 나는 또 가장 많은 것들을 해치웠다. 고 3 때도 하지 않던 잠죽자(잠은 죽어서 자자)를 고단한 워킹맘 초기에 명언처럼 새겼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성장에 매달렸던 이유는 뭘까. 성장에도 관성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돈벌이를 하고, 아이 케어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버리는 삶이 괴로웠던 걸까.  '내 일신은 물론 내가 낳은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그 책임감은 관성처럼 이어졌다. 책임에 대한 질량이 커질수록 관성의 힘은 세졌다. 그리고 책임감에 대한 관성은 더 나은 나, 엄마라는 성장의 관성이 되었다. 피곤한 나날이지만 멈출 수 없는 관성의 법칙으로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채찍질로 느슨해지는 나를 경계했다.








고효율의 끝판을 달리던 1년 전 그날, 책상에 앉아 내년도의 계획을 세우던 나는 제주살이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의 숫자에 연연하며 휴식이란 것을 잊고 휴직 또한 성장의 한 과정으로서 받아들이는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리스트를 빼곡히 채워갔다. 그때는 그랬다. 나는 성장이라는 관성 속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주에 와서 한 달 반 제주살이가 실제 내 삶이, 지금이 되어 보니 내가 채웠던 빼곡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히 휴식다운 삶을 살아본 적이 있던가. 이토록 죄책감 없던 늦잠을 누려본 적이 있던가. 성장하지 않아도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하다는 충만감을 느꼈던가. 마음 편한 휴식이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면서 관성이 되고, 휴식에도 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는 나는 나의 빼곡한 제주 버킷 리스트를 모두 지우고 단 하나로 집약했다. 바로 ‘비효율로 살 것’.








얼마나 아름답고 쓸모없는 단어인지, 나에겐 너무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나지만 그래서 꽤나 멋져 아직도 이 말을 깰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다. 가장 애매한 시간이라고 느꼈던 오후 4시. 이미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다음번 숙소를 구경하는 설레임을 즐기기도 하고, 빌린 책을 반납하러가는 소소한 드라이브를 하기도 한다. 또 어쩌나 얻어걸린 집 근처 맛집에 우리만의 베스트 5를 만들기도 한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여행을 하지않아도 충분히 흡족하다. 하루에 딱 한 가지씩만 작은 동력으로 비효율적인 느린 삶을 산다.





잘 누린 휴식의 관성은 행복의 관성으로 그리고 점차 내 삶에 대한 만족의 관성으로 이어질 것임을 감히 확신하기에 오늘도 열심히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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