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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Feb 05. 2022

하루 8만 원의 행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의 탕진이 우리를 또 기다리잖아

오늘 쓸 수 있는 경비는 8만 원이야!




제주살이의 모든 경제권을 쥐고있는 남편이 포부 넘치게 말했다. 하루 10만 원씩 한 달 30일 계산해서 300만 원으로 계산했던 게 아니였는가. 그 내막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날 하루 먹고 마시고 놀러 가고 체험하는데 순수하게 8만 원을 쓰고 2만 원씩 예비비로 모아놔야 3일에 한번 꼴로 마트에서 장을 보는 식재료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결혼 후 8년간 내가 해본 그 궁상 댁의 바통을 이제는 남편에게 넘겨줬다. 세상 쓰기 좋아하던 소비요정인 그는 하루치의 소비 상한가를 제한하며 한달을 관리하는 알뜰한 제주댁이 되었다. 제주에 와서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역할을 바꿔 살아본다. 그가 가계부를 쓰는 모습은 반가우면서도 고소한 미묘한 감정이 들게 한다.




이미 쓰기로 한 전체 예산을 알고 있으니 그걸 하루 단위로 나누든, 한 달 단위로 나누든 이미 그 돈은 쓸 돈이기에 우리의 돈은 아니다. 집 밖으로 차를 타고 나가는 순간부터 길 바닥에 고스란히 버리고 오는 그 8만 원을 우리는 어떻게 재미나게 써야 할까?




하루 8만 원은 오늘 하루를 경험하는 오롯이 하루치의 여행비다. 여행이라는 게 보통이 그렇듯 먹고(맛집을 가고), 마시고(카페를 가고), 보고(입장료를 내고), 경험하는(놀이를 하고) 일이 대부분이다. 이 여행비를 아끼려면 한 달 렌트한 집에서만 틀어박혀 세끼 집밥을 해 먹고 놀아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제주살이가 맞을까 싶었다. 8만 원이라는 한도 내에서는 오늘 하루 신명 나게 모두 써버리고 오자고 호탕하게 집 밖으로 나섰다.




남편은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부인은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루 한 끼는 꼭 맛있는 것을 사 먹고 하루 한 번은 가고 싶었던 곳을 가야 한다. 아침을 집에서 든든히 챙겨 먹고 점심이나 저녁 한 끼를 먹고 싶던 맛집에서 먹을 때면 남편은 음식이 나올 때부터 물개 박수를 친다. 아이랑 승마 체험을 하거나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커스텀 향수를 만들 때면 부인은 사진 좀 찍어달라며 흥분해선 휴대폰을 내민다.




어떤 날의 8만 원은 밥 값 하나에 몽땅 부어 넣기도, 어떤 날의 8만 원은 아쿠아리움 입장권으로 모두 소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괜찮다. 그날의 전재산을 모두 다 쓰고 집으로 돌아와도 내일의 탕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오늘의 소비는 내일 또 리셋될 테니 말이다. 단벌신사로 3일 동안 같은 옷을 입어도 나 자신이 전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자신감은 오늘 하루치의 여행비를 완벽하게 소비하고 오늘 하루를 진탕 잘 놀다 돌아왔다는 충족감에서 나온다. 우리가 어디에서 돈을 쓰고 왔을 때 가장 행복한지를  떠올려보면 아닌 부분에선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게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 같은 하루치의 돈을 떠올리며 부자 같은 마음으로 되뇐다. 오늘은 뭘 할까? 뭘 먹을까? 뭘 볼까?  그리고, 오늘도 후회없이 열심히 쓰고 돌아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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