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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Jan 13. 2022

개나 소나 세계여행

얼마가 드는지는 알고있니


나, 우리 딸이 학교 들어가기 전에
육아휴직 내고 꼭 함께 세계여행을 떠날 거야.




남편에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1초도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아, 정말 꿈같은 얘기네, 정말 좋겠네요. 꼭 이루길 바라요" 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정말 그러길 바라, 우리에게 그럴만한 돈이 있다면 말이야. 어린아이의 장래희망에 적힌 '대통령'이라는 글자를 본 것처럼 나는 아주 사무적으로 그의 장래희망을 격려해줬다.

 



아이는 이제 세 살.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처가살이를 하며 아이 양육과 살림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했다. 남편이 세계여행을 운운하고 있던 당시 나의 장래희망은 어서 돈을 모아 엄마 집 근처의 방 세 개짜리 빌라를 매매하는 일이였다. 모아둔 돈과 대출을 받아 남들처럼 번듯하게 '우리 집'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것이 나의 희망이요, 꿈이 되겠다.




고단한 세상사로 정신없는 나날이지만, 가정 경제의 주체인 내가 관리하는 정기 적금이 만기 될 때마다 희망이 반짝였다. 만기 된 적금을 예금으로 묶어놓고, 앞으로 아이가 몇 살까지는 엄마 아빠 집에서 지내면서 얼마를 모을 수 있겠다는 희망 회로를 돌리며 자금 엑셀 시트를 채울 때면 나는 이미 부자가 된 듯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내 마음과는 별개로 그는 잊을만하면 세계여행을 얘기하고, 또 잊을만하면 그 애기를 꺼내며 내 속을 뒤집었다.




우리 앞으로 된 번듯한 집이라도 있어?

세계여행 1년 가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나 얘기하는 거야?

당신은 휴직하면 되지만, 나는 일을 그만둬야 해!



앞으로 우리의 인생은 길고, 평생 개미처럼 일하다 죽을 건데,

딱 1년만 아이랑 함께 많은 경험하고 오자는 거야.

돈은 또 벌 수 있지만 시간을 다시 올 수 없어.




여행 에세이에서 막 튀어나올 것 같은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말을 그는 아직도 순수한 가슴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나는 아이를 낳고 보니 그런 멋진 말은 다 잊어버렸고, 그저 아이랑 안정된 울타리에서 오손도손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꿈이 되어버린 어미가 되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다.




싸움과 회유가 수시로 오가고,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너는 우리 살 집만 마련돼도 생각해본다는 거지? 귀찮기도 하고 대거리하기도 싫어서 그렇다고 했다. 실제로 당장에 나는 우리 집만 있어도 부자 같았으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 건지 알고자 있자 싶어 세계여행 비용을 검색했다.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한 달에 한 도시를 사는 한달살이를 기준으로 가고 싶다던 몇 개 나라의 도시를 추려 계산했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지라 부부 세계 여행비에서 플러스 알파를 많이해야했다. 아이와 배낭족처럼 살수는 없다. 워낙에 겁이 많아 만일의 사태에 예비비까지 넣으면 딱 1억이었다. 다시 들어도 기가차는 숫자다.  




그렇게 집이 생긴다는 전제조건과 2022년이라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 동안 최대한 잊고 살려고 노력했고, 어느 날 덜컥 우리 부부 공동명의 집이 생겼다. 그리고 시간도 꽤 흘러 날짜는 2019년 12월을 가리켰다.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이 계획이 코 앞까지 닥쳤다. 더는 미룰 수도 없고, 미룰 핑계도 사라졌다. 내가 가지 않겠다면 아이라도 데리고 혼자 가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나무꾼과 사는 선녀의 심정으로 계획을 짜야만 했다. 여행 일정 계획이 아니라 돈 계획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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