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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Jan 25. 2022

1억이 담긴 체크카드

우리의 1년이 이 작은 네모 플라스틱에 담겼다

너는 지금 1억이 담긴 카드를
음식물 쓰레기 카드랑 같이 두고 있는 거야




현관 근처 서랍장 위 그러니까 내가 차 키, 음식물 쓰레기 카드를 두는 트레이에 눈에 띄지도 않는 검정 체크카드를 두고 그가 한 말이다. 코로나 시국으로 아이를 동반한 세계여행은 불발되며 우리는 국내에서도 가장 이국 같은 제주도 1년 살이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요즘 같은 상황에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 나겠지만, 세계여행을 원하지 않던 나에게는 코로나가 조금 감사했다. 




당초부터 세계여행을 염두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기에, 우리의 예산이 어쩌면 많이 남지 않을까. 잘하면 그 예산의 반 정도로 충분히 멋지게 제주살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옛 제주스러운 전통가옥을 빌려 놀멍 쉬멍 하며 밥도 해 먹고, 입장료 안내는 관광지에 가고, 돈 안 드는 운동 하면서 제주 도민처럼 그렇게 살면, 모아놓은 예산을 탕진하지 않고 반은 남겨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1억이 들었다는 카드를 노려보며, 지출비용을 생각했다. 




1억이면 한 달에 대략 800만 원의 가용금액이 나온다. 

, 이제 이 800만 원을 어떻게 쓰면 될까?




숙소부터 찾았다. 세상에. 우리만 이토록 팔자가 좋은 줄 알았는데(우리만 큰 결심하는 줄 알았는데), 제주살이 하려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걸까. 해외로의 여행이 차단되면서 축적된 여행 욕구는 제주로 분출이 된 듯, 제주 숙소 수요가 엄청나 졌다. 코로나 이전의 제주 숙소와 현재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되었다. 특히 요즘 트렌드가 된 '제주 한달살이' 덕분에 독채로 된 숙소의 가격은 상당히 높아졌다.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려면 비, 성수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 달에 300만 원 전후가 되었다. (최저 230만-400만 원까지, 그 평균값은 대략 300만 원 이이였다)

800만 원-300만 원=500만 원




여행이 아닌 제주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집'이다. 포기할 수 없다. 전체 항목 중 가장 큰 비율을 집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살이는 원래 집을 처분하고 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두 집 살이를 하는 꼴이다. 원래 집을 기준으로 나가는 비용(대출비, 공과잡비, 아파트 관리비 등)들과 숨만 쉬어도 하루치의 제주 집값 그리고 고정 지출비(연금보험 및 부모님 생활비 등)도 그대로 나간다. 

800만 원-300만 원-200만 원=300만 원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일에 치이던 부모는 아이 곁에서 하루 종일 함께하며 즐겁게 노는 상상만 했다. 4세였던 아이가 7세가 되고 집에서 부모랑 장난치며 놀던 녀석은 이제는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게 세상 행복한 일이 되었다. 부모인 우리들이야 이제 사회화를 피해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지만, 아이는 이제 막 친구 관계가 중요해졌다. 그걸 억지로 끊고 낯선 땅으로 홀연히 와 버렸으니 아이의 세계도 막힌 것과 다른 없는 셈이다. 사교적인 아이를 위해 공식적이자 주기적으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교육 기관이 필요했다. 기간이 불안정해 정규 유치원 대신 월 별로 등록하는 영어 유치원과 취미 학원들을 찾았다. 유치원비와 몇 개의 취미 학원비로 약 150만 원이 나가게 된다. 

800만 원-300만 원-200만 원-150만 원=150만 원




이제 먹고, 쓰고, 놀러 다니는 순수한 생활비가 필요하다. 맞벌이를 하던 때에도 우리 가계의 한 달 생활비는 200-300만 원이었다. 우리 부부도 배우러 다니고, 주말에 어디 놀러 가기도 할 테니 300만 원을 잡자. 그럼 -150만 원이 된다. 사람이 참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다행히 우리 부부 둘다의 육아 휴직 비를 더 해 그 마이너스 금액을 충당한다.

800만 원-300만 원-200만 원-150만 원-300만 원+150만 원=0원




이렇게 살면 딱 800만 원을 한 달에 다 쓰는데, 누군가에겐 검소할 것이고, 누군가에겐 사치스러운 금액이다. 1년에 1억을 쓰면 부자처럼 떵떵거리며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 줄 알았지만, 실제 우리 부부를 위해 쓰는 한 달 생활비는 원래 집에서 쓰는 생활비와 비슷하다. 다만 제주라는 곳에서 한 달 단위지만 발 뻗고 잘 수 있는 우리 집이 있고, 배워보게 하고 싶던 아이 교육을 맘껏 시키는 점이 추가되었다. 또 제주 끝에서 끝까지 1시간 반이면 충분한 여행을 언제든 떠날 수도 있다. 




이 800만 원을 사치스러운 듯 알뜰하게, 방탕한 듯 계획적이게 탕진하며 그 재미를 완벽하게 누려보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금액, 우리 생에 다시없을 '탕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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