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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공장노동자였습니다

나를 위한 시간의 질문들 05

by JI SOOOP

나는 한때 공장 노동자였습니다.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유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의 GS칼텍스입니다.

원유를 정제하는 아주 큰 회사였습니다.


처음엔 그런 회사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입사만 해도 거리에 플래카드가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만큼 선망하는 그런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회사라는 자체를 몰랐습니다.

왜 이런 곳을 다녀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기계장치가 매일 쉬지 않고 굉음을 지르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부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붙잡혀 와서(?) 공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반면에 돈을 너무 많이 줬습니다.

우습게도 한 달 내내 써도 돈이 줄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 쓸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책에서만 경험했던 인간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왜 태어났는가?

우리는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돈을 벌수록 공허했습니다.

그때 위안이 되었던 것이 사진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찍었고, 닥치는 대로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 베이컨의 화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간 육체의 고통, 고립, 절망, 공포 등

내가 처한 현실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렇게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 <HUMAN REFIFERY>입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인간정제소>입니다.

인간도 정제할 수 있다면 얼마만큼 순수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human refinery 03__gelatin silver print_ 20×24inch_ 1999-2000.jpg
human refinery 01__gelatin silver print_ 140×90cm_ 1999-2000.jpg


벌써 24년이 흘렀습니다. 인사동에서의 첫 전시. 인사동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수요일만 되면 전시 오프닝으로 북적였던 인사동거리였죠. 제가 전시했던 하우아트갤러리도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의 첫 전시를 일면식도 없는 배을선 기자님이 기사를 써줬습니다. 기타 연주를 들으며 기사를 썼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아래는 첫 전시에 대한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밤, 공장, 그리고 나체의 남자

실존과 고독... 지성배 씨 전시회 '인간정제소'



흑백 사진이 있다.
공장이 보인다.
그리고 나체의 남자.
그는 심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다.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벗은 게 창피해 얼굴을 가린 것일까? 착각은 자유.

공장과 나체의 남자 사이, 무엇이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일까?


4월 18일(금)부터 24일(화) 요일까지 인사동 하우아트갤러리에서 '지성배 사진전'이 열린다. 그가 전시한 사진의 주제는 'Human Refinery', 즉 '인간정제소'라는 의미다.


국가 보안 시설의 어느 공장, 밤, 그리고 작가 지성배.


빛이 없는 밤, 인공의 빛 사이로 작가는 옷을 벗고 공장의 파이프에 기대어 선다. 무엇이 그를 그곳에 있게 했을까?


그가 작품을 제작한 의도는 기계장치, 즉 공장이라는 '문명'에 종속된 인간, 즉 '지성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문명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절망과 고뇌와 소외를 호소하기 위해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공장의 맥박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진 안에는 공장의 파이프라인과 작가 지성배의 심장이 함께 꿈틀댄다.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육체에 관한 습작>을 보게 되었고 그가 구성하고 있던 이미지와 상당히 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베이컨의 그림들을 접목시켰지만, 단지 부분일 뿐, 베이컨은 육체를 가만두지 않는다. 지성배는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 청명한 밤하늘이 나타남을 기다렸다가 자신의 숨 죽은 육체를 카메라에 노출시켰다. 살아있는 것은 그의 얼굴뿐.


그가 얼굴을 움직여 지운 이유는 존재가치의 상실 때문이다. 기계 속에서 자연적인 '나'는 없다. 다분히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내'가 존재할 뿐이다. 그는 "생각이 많으면 기계는 돌아가지 않는다. 나를 지움으로써 내 존재를 항변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셀프 컨트롤 방식으로 촬영을 했다. 촬영노출 시간을 1분 30초에서 2분 사이로, 조리개를 f/22로 조인 후, 자신이 위치해야 할 그곳으로 뛰어가 출연까지 완성했다. 그는 f/22로 조리개를 조린 이유에 대해 차가운 기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고, 조리개를 조여서 시간이 늘어난 만큼 작가가 사진 속에 위치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임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지성배의 사진은 보는 이들을 문명의 이기 속에서 탈주시키며 밤의 정적 속으로 미끄러지게 한다. 자연의 빛이 내리쬐는 인간의 낮시간은 문명 그 자체이다. 컴퓨터를 마주하며 전화기와 팩스,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생존'의 목적 아래 많은 것을 잃고 또 잃게 한다.


밤은 어떠한가? 어두운 밤을 환기시키는 인공의 빛은 없어야 한다. 빛이 있는 한, 인간은 문명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최면, 혹은 숙면의 시간에 인공의 빛이 가득하다. 인간은 면(眠)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깨어있는 인간.


인간의 고독은 깨어있음으로 인해 발기하는 것이 아닐까?


밤, 어둠이 가져다주는 사색의 시간. 고독은 배(倍)가 된다. 누가 이 차가운 실존(失存)의 시간을, 고독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인간은 자위(自慰)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가.


작가 지성배는 스스로 나체의 몸이 되어 실존의 조각들을 기쁘게, 혹은 고통스럽게 맞이하고 있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인간정제소"라 명명한 문명 속에서 정제되고 있거나..


<후기>

안토니오 포르치오네의 나일론 스트링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음악 "Night Passage(밤의 항해)"를 들으며 그의 사진들을 바라본다. 그의 사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고독이었다. 한 움큼의 고통을 토해내고선... 그리곤... 인공의 빛과 자연의 빛이 교집합을 이루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 안토니오 포르치오네(Antonio Forcione) - 이탈리아 태생의 기타리스트로 영국에서 활동 중, 현재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멀티 기타리스트. 나일론 & 스틸 스트링 기타와 클래시컬 기타, 스패니쉬 기타 연주가 특히 뛰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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