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간의 질문들 03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저 숫자가 하나 늘어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서른이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고, 마흔이 되면 삶의 방향이 또렷해질 줄 알았으며, 쉰이 되면 마음도 어느 정도 단단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쉰을 넘긴 지금, 마음은 여전히 어설프고
삶은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벌써 오십이라니…”
놀라움과 어색함이 섞인 이 말이 요즘은 자주 제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주변 사람들도 농담처럼 웃으며 비슷한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말들 속에는 흘러간 시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체념 같은 감정이 고요히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 몸은 이 체념을 누구보다도 친절하게, 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보여줍니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도 멀쩡했는데, 이제는 조금만 늦게 자도 다음 날 하루가 몽롱합니다.
계단을 오를 때 무릎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안경을 올리고 글을 읽는 일이 점점 잦아집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던 이름이나 숫자들이 이젠 자꾸만 머릿속에서 미끄러져 나가곤 합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나이를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반응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조급했고,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뿐이어서
오직 현재에 집중하자며 제 마음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불쑥불쑥 과거가 말을 걸어옵니다.
문득 떠오르는 옛 친구의 이름, 오래전에 듣던 노래,
잊고 지냈던 풍경 하나가 마음 한가운데를 스쳐 지나갑니다.
기억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와
제 안의 시간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 ‘그때’를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나이 듦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와 가까워지고, 미래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몸은 이미 나이를 받아들였는데,
마음은 아직도 그걸 인정하지 못한 채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고 있습니다.
가끔 거울 앞에 서서 예전의 제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뱃살이 불룩하게 올랐고,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 얼굴은 지금의 제 얼굴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이 듦은 단지 쇠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조급했던 마음의 모서리가 둥글어졌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훨씬 느긋해졌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큰일이라 여겼을 일들도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하며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제 중심을 지키는 힘도 생긴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애틋함이 생겼습니다.
젊을 때는 늘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았습니다.
성공해야 했고, 인정받아야 했고, 남들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가 걸어온 시간 자체가 이미 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요.
누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고,
꼭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요.
그저 제 속도에 맞춰
조용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 듦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며듭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의 무게감,
계절이 바뀌는 속도,
사람을 보내고 또 다시 만나는 일들,
사랑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시간들.
그 모든 층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때때로 저를 아프게 하고,
때때로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듦이란, 어쩌면 삶을 더 깊이 이해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고요.
젊음의 찬란한 순간들도 분명 아름답지만,
시간 속에서 조금씩 익어가는
이 나이의 감정도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두렵지만,
그럼에도 나이 듦은
삶이 제게 건네는 또 하나의 선물 같습니다.
비로소
제 안의 목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