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6 #1 이유진
문이 열렸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과 벽면, 천장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온통 하얗다. 하늘을 볼 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원근감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얼마나 작은지 혹은 큰지 가늠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수술실 같기도 하고 실험실 같기도 한 삭막한 풍경 속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딱히 불만은 없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으니까. Garden 컨셉을 골랐다면 파릇파릇한 잔디를 배경으로 연분홍색 작약, 청보랏빛 수국과 붓꽃, 크림색 장미가 한껏 흐드러진 꽃 정원에 티파티 테이블을 차려줬을 것이다. Cozy 컨셉을 골랐다면 통나무집 안에 난롯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팔걸이에는 뜨개질감이 걸쳐진 흔들의자를 준비했을 테고. 그가 개발한 가상현실 프로그램 '청자 베개'가 제공하는 선택지는 그 밖에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는 'Plain'을 선택했다. 이것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아니겠지만, 오늘은 어떤 눈속임에도 현혹되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힘겹게 몸을 내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생명 연장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사님은 AI 생명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 장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 적당히 톤이 낮고, 말이 너무 빠르지 않고, 다정한 느낌을 준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샘플링을 추출했겠지. 하지만 본질은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에 있기에 그는 다소 불쾌해졌다. 장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선정이라.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기쁘다기보다는 가소로울 뿐이다. 내 가치를 판단해서 수명을 결정한다? 마치 너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와서 AI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저울질하는 게 옳은가를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인간의 생명 연장 결정권이 AI에게 넘어간 지 20년도 지난 시점이다. 인간이 하면 부정과 비리를 피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생명윤리위원회의 심사를 요청한 것은 그 자신이다. 그의 의지에 따라 심사했고 합격 판정을 내렸으니 '제멋대로'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이 새삼스러운 거부감은 AI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의지와 아무 상관 없이 그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아버지는 인류의 도약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 AI 전문가였다. 그는 한 번도 아버지를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그의 성장기는 기나긴 친자확인 소송과 함께했다. 결국 그들의 부자 관계가 입증된 이후, 법정 밖으로 던져진 이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편리한 시점이었다. 친자로 입증된 그에게 거액의 유산이 남겨졌고, 그걸로 스타트업을 차릴 수 있었으니까. 불운한 성장 배경을 감안하면 그가 가상현실에 빠져든 것도 이해가 간다는 둥 역시 아버지의 비상한 두뇌를 물려받아 유니콘기업의 수장이 되었다는 둥 지긋지긋한 헛소리를 평생 들어야 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여기저기 투자해달라고 손 벌리는 대신 시간을 아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공정 거래였다고 해야겠지.
"서류상으로 안내드린 것처럼 박사님께는 3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자신이 정말 생명 연장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필요한 이상으로 누리며 살아왔다. 심해에 가고 싶으면 심해를 가고, 우주에 가고 싶으면 우주로 갔다. 돈이건 여자건 친구건 평생 부족할 일이 없었다. 물론 그 관계가 얼마나 진실한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돈에게 진실성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동력은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다. 새롭게 원하는 것이 생겨,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할 때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다양한 욕망을 충족한 인생이었고, 이제는 더 원할 만한 것도 없다. 마지막 욕망인 생명 연장을 제외하면. 정말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선택지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는 AI니까 한 번 아니라 100번을 더 말해달라고 해도 별 문제는 없다.
"1번은 트랜스휴먼, 인간의 몸에서 늙고 병드는 소모품을 신소재로 대체해 현재 자신의 육신을 유지하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2번은 디지털휴먼, 의식만 따로 분리해 클라우드에 업로드함으로써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후 다시 육체를 원할 경우에 대비해 현재 육체를 냉동 보존하는 옵션도 가능합니다.
3번은 분리한 의식을 클론에 재이식하는 방법입니다. 스스로를 복제해 자신의 젊은 육체를 사용할 수도 있고, 정반대의 육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박사님은 노년의 남성이니 이 경우에는 젊은 여성이 되겠군요. 단, 미성년자 클론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클론의 나이는 20세 이후부터 설정 가능합니다."
이미 검토한 내용이다. 하지만 '젊은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예시를 듣자 언젠가 한 20대 여성에게서 받았던 쪽지가 떠올랐다. 너무 자주 펼쳐서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꺼낼 필요도 없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 인생의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단언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바로 너였다고.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너를 간직할게. 너도 꼭 그렇게 나를 간직해 줘. 이 세상 무엇도, 누구도, 시간마저도 그걸 변하게 할 수는 없어.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어.
그게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평생을 모르고 살았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2번째 인생을 살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클라우드와 합일돼서 삼라만상에 통달하면 그때 이해하게 될까. 아니면 내가 나인 채로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 사이의 영원한 연결이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유효한 것일까. 긴 한숨의 끝에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했습니다. 내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