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아들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한숨도 나오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냥 저 그룹에 끼지 않고 좀 떨어져 지내면 무시당할 일도 없을 텐데. 아들은 마치 굴욕을 기회비용쯤으로 여기며 감당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또래 집단에 끼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알겠는데, 아들아 이건 비굴한 거야. 흔히 따돌림 같은 학교폭력을 당한 친구들은 학교의 공식적 행사에 참여하기를 꺼린다고 하던데, 어머 우리 아들은 어디든 다 참여하려고 하는 아이였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비위 좋은 아이도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2박 3일간의 학교 스키캠프날이 다가왔다.
캠프기간 동안 숙소 방배정은 다행히 순하고 밝은 친구들과 같이 돼서 안심하고 있었다. 아들반에서 참여하는 남학생 총 7명이 방 두 개에 나뉘어 각각 4명, 3명씩 배정됐다.
학교에서는 부모님들을 위해 활동 중간중간 아이들 사진을 밴드에 올려줬다. 같은 방으로 배정받은 친구들과 한조로 움직였다. 스키강습도 식사도 나름 즐거워 보이는 모습들이어서 내심 안심을 했다.
저녁쯤 되자 아이들 레크리에이션 활동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1 첫 번째 영상
일렬로 줄지어 앞사람에게 토닥토닥 안마해 주는 시간이었다. 클로즈업된 영상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 아이들이 모두 낄낄대고 좋아라 한다. 아픔과 간지러움과 웃음이 범벅이 된 도가니탕 같았다. 이제 반대로 돌아 앉아 뒤에 있던 친구에게 대갚음하는 시간이다. 뒤돌아 앉은 우리 아들 앞에 앉아 있던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아들을 불쾌한 표정으로 때리기 시작한다. 토닥토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등짝을 쿵쿵 인상까지 써가며 가격한다. 아들은 많이 아픈지 반쯤 일어선다. 앞 친구 안마하느라(사실 앞 친구도 아파하긴 하는 것 같다) 뒷 친구 피하느라 인상을 쓰는 건지 웃는 건지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표정이 보인다. 계속 즐거웠던 아들 얼굴에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상은 그것으로 끝났다. 아들이 있던 부분을 주목한 사람이라면, 당사자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냥 웃으며 볼 수 있는 영상은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도 있었지만, 보는 동안 민망했다. 아들이 들키기 싫어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서 아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2 마지막날 조식시간 사진에서는 네 명이 앉는 테이블에 아들만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혹시 마지막날 아침 혼자 먹었니?"
"응"
"왜?"
"앉을자리가 다 차서 그냥 나 혼자 가서 먹었어. 그건 아무렇지 않아. 밥 먹는데 스키캠프장 선생님이 잠깐 앞에 앉으시더니 좋아하는 거 뭐냐고 물어보셔서 포켓몬 카드게임 얘기도 나눴어."
"그랬구나~ 자리 없으면 그럴 수 있지. 엄마는 맨날 혼자 먹는데.. 얼마 전에 간 덮밥집에서 인생 가지덮밥 발견했잖아~"
아무렇지 않기는... 돌아온 날 밤에 아들은 구토를 시작했다.
그게 스트레스성 위장장애란다 아들아.
"여보, 사진 봐봐. 우리 아들 혼자 아침 먹고 있어. 나 선생님들한테 화가 나. 그 많은 80명 인원 아이들이 밥을 먹는데, 혼자 있게 된 아이 챙겨 줄 수도 있잖아. 테이블에 의자 한 개를 더 넣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동행한 담임 선생님이랑 보조 선생님은 뭐 한 거야."
"그걸 왜 챙겨줘. 안 챙겨 줄 수도 있는 거야. 우리 아들이 성인이 되면 밥 혼자 먹을 수도 있잖아... 너도 그랬을 거 아니야. 어른이 돼서 혼자 하는 것들을 지금 혼자 해도 나쁠 건 없어. 선생님이 굳이 그런 것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초등학생인데.. 난 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뭐 다 그럴 수도 있는 상황들이긴 했다. 둘만 짝짓는 레크레이션 게임에서는 혼자만 남을 수도 있고, 밥도 혼자만 먹을 수도 있고, 버스도 혼자 탈 수 있다.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정체를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묘한 자잘한 일들 뿐이었다.
오는 길 통화에서 아들 목소리가 좋지 않았던 것도 맘이 쓰였다.
돌아와서 아들이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아들이 처음 보는 친구와 버스 뒷자리에서 즐겁게 콘칩을 먹으며 영상 찍은 것을 봤다. 떠 볼 요량으로 넌지시 말해봤다.
"아들~이 친구 누구야? 얘랑 즐거워 보인다~"
"이름 몰라. 그냥 버스에서 같이 앉게 됐어."
"이런 친구가 주변에 많아야 하는데, 참 좋아 보인다."
대뜸 나를 뒤에서 껴안고 말한다.
"엄마, 5학년땐 나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나를 모르는 아이들과 같은 반이 됐으면 좋겠어."
그래, 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로 있다는 건 외로운 일일 테지.
아들이 진심을 말했구나. 내게 털어놓고 싶은 게 있구나.
하던 일을 놓고, 아들을 마주 보고 경청할 준비가 됐음을 아들이 느끼게 해 주었다. 아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캠프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했다.
"스키캠프에서 워터파크를 기다리는데 A가 나한테 찐따라고 했어."
"찐따? 어떤 식으로? 기분 나쁘게?"
"약간 비웃으면서? 비아냥 거리면서."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어?"
"쓰레기." (찐따라는 말을 듣고 소심하게 쓰레기라고 하긴 했겠지. 들리지도 않게. 하.. 찐따라니.) 저번에는 B가 왕따라고도 했어. 왕따놀이 한다며 가위바위보 하자더니, 내가 지니깐 나더러 왕따라며 저리가래."
"쓰레기....? 잘했다. 그런데 아들 너 워터파크 기다릴 때 사진 봐봐. 얘네들이랑 너랑 같이 앉아있어~. 사이가 괜찮은 거 아냐? 그런데 얘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엄마 내가 좀 떨어져 있잖아. 줄 서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아들도 어린아이니까 혹여 거짓말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몇 차례 질문을 바꿔가며 물어봤지만 모순을 찾을 순 없었다.
욕도 아니고 찐따나 왕따라니. 이건 수치심이 드는 단어였다.
차라리 욕을 하는 편이 나았다. 욕을 하면 똑같이 욕으로 받아치면 되는 거였다. 욕이라는 건 특정 대상에 대한 묘사나 맥락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고, 그냥 미성숙한 화의 분출 일 뿐이기에 상대가 받는 상처의 잔상이 깊진 않다. 편의점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중학생들 보면 친한 친구들끼리 서로 의미 없는 욕을 주고받기도 하더라. 친구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되거나 자존심 상할 만한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특히 A는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아들이 민망할 만한 말을 해댄다. 다른 친구에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정말이지 외적인 걸로만 봐선 의젓한 형님 분위기를 주는 이 A라는 아이는 무시해도 되는 대상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대며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B. 이 아이는 노골적으로 아들을 놀이에서 배제시킨다. 처음에는 축구에 대놓고 안 껴주다가 엄마랑 선생님께 훈계를 받은 뒤 축구에 안 껴주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학교에서 축구할 땐 아들과 절대 같은 편에 들지 않으려 하고, 같은 편이 되면 가위바위보를 다시 해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땡깡을 부리고 기어이 다른 편이 되려고 할 만큼 우리 아들을 싫어한다. 다른 친구들로부터 우리 아들을 배제시키며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도록 한다. 유독 우리 아들만 과하게 따돌리는 것을 눈치 첸 다른 친구가 아들한테 'B는 왜 너한테만 그래?'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 내가 OO랑 포켓몬 카드 거래하려는데, OO가 아무래도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다며 다른 친구 ㅁㅁ한테 이 거래가 자기한테 손해냐고 물어봤어. 그런데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B가 껴들더니 무조건 손해라면서, 나랑 거래하지 말래. 집에 있는 자기 거를 굳이 가져다주겠대. 그래서 OO랑 거래 못했어."
이렇게 놀이를 방해하는 자잘한 사건들이 쌓이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아들은 B에게 노이로제 반응을 보인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 아들은 소극적으로 참는 듯하다(그러다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들아 이럴 땐 어른들은 손절이란 것을 한단다.
같이 놀아는 주고 선진적인 놀이를 알려주는 A는 모욕적인 말로 상처 주고, 노골적으로 놀이를 방해하거나 아들을 따돌리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독려하는 것은 B가 주로 한다. 사실 아들은 A보다는 B를 더 싫어한다. 누굴 더 싫어하든,
이 A와 B는 아들에게 유해한 환상의 콤비다.
나름 수확이 있었다. A는 이번엔 찐따라는 비하발언을 다른 친구들이 있는 가운데 사용했다.
이제 두 가지 손에 잡히는 공식적으로 건의할 수 있는 사안이 생겼다.
스키캠프에서 찐따라는 비하발언을 해서 모욕감을 준 것과 그간 과도하게 놀이나 관계에서 자주 배제시킨 것.
아들에게 원하는 바를 물었다.
"아들, 엄마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 단지 도와줄 수 있을 뿐이야. 엄마가 학교 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볼 생각인데, 아들생각은 어때? 바라는 게 있니? 아들이 피해를 본 쪽이니깐 우선 아들이 원하는 바를 말해봐."
1. A나 B가 찐따 왕따라고 놀리지 않으면 된다.
2.B는 축구하거나 놀 때 일부러 주도해서 방해하지 말아라.
3. 집단면담은 안 하고 싶다.
아들은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체로 아이들은 사건이 공식화되는 것에 부담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른들 앞에서 요목조목 본인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한 일일 수 있다. 이런 일이 표면으로 크게 드러날 경우 다른 친구들마저 본인과 놀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A, B을 중심으로 반 아이들이 모이고 노는데, 이 두 아이를 버리면 자기가 껴서 놀 친구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거다. 이점은 나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혹여나 놀던 친구들 마저 아들을 외면할 까봐 나도 겁이 났다.
선생님 면담 준비
선생님께 밴드 톡으로 면담을 신청해서 그간 아들의 고충을 정리해 말씀드리고, 스키캠프에서 있던 일도 말씀드릴 계획이었다. 상대방 부모님과 만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맘카페에서 다른 부보님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1 부모 면담을 추천하지 않는 답변들은 유경험을 공유해 주며 상대방 부모가 증거 있냐며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기도 하고, 친하던 부모들 간의 관계는 당연히 깨지고, 자칫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고, 오히려 상처를 입게 될 수 있다며 부모 만남을 추천하진 않았다. 그리고 너희 아들도 잘못이 많다며 반격을 할 수 있으니, 아들의 잘못도 마주할 것을 예상하고 마음먹고 가라고도 전한다.
#2 면담을 추천하는 쪽은 꼭 선생님 입회 하에 만날 것을 권유했다.
#3 그리고 교육청 학교폭력위원회 교육에 참석하신 분은 교육청 자체에서도 '학부모간 대면은 최소화하라는 지침'을 준다고 한단다.
#4 인상적인 댓글은 얼마 전 비슷한 학폭사례를 처리한 경험이 있던 중학교 교사분의 글이었다. 상황이 눈에 선해서 답변을 단다고 했다. 가해자 아이들이 피해자에게 못생겼다며 외모비하 발언을 지속적으로 한 모양이었다. 결국 학폭이 열리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는데, 마지막까지도 가해자 부모들은 못생겨서 못생겼다고 말한 건데, 학폭까지 간 게 심하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사과는 하지만 우리 아이가 진짜 나쁜 마음으로 그랬을 리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마음 단단히 먹으시라고 이런 학부모들이 많다고 전한다.
사실 우리 아들도 다 잘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상담하게 되면 우리 아들의 현실을 직시할 용기도 필요했다. 관계에서 우리 아들이 다 잘했을 리 없다. 유독 두 친구와 싸움이 생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싸움도 지금에 와서 보면 의구심이 든다. 일종의 피해자의 도발은 아니었을까?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 때문에 또다시 공격적 행동을 하게 되는 행동이 피해자들에게 종종 나타난다고도 한다니까.
남편은 말한다. "아마 몇 번 참다가 폭발하긴 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아들 순한 편이지만 일방적이고, 뭐에 꽂히면 다른 사람 말 잘 못 듣고, 배려하는 기술도 없잖아. 그래서 외면받는지도 본인은 잘 모르고."
그래도 이런 상황은 아니다. 어찌 됐건 피해자다. 뭉쳐서 대놓고 따돌리고 비하발언하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일 뿐이다.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싸우고 화해하면서 관계를 건강하게 정돈하는 법을 배우라는 이야기다. 다시 친해지건 사이가 멀어지건 어떤 한쪽만 일방적으로 상처받는 관계는 불량하고 기형적인 관계다. 가해자들은 우리 아들이 이상해서 그랬다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상한 건 모르겠지만 이상해도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상대든 상대를 의도적으로 따돌리거나 비하발언을 일삼으면 안 된다. 생각이 많아졌다. 이게 잘못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 순자의 성악설에서 기인해 법가의 법치주의로 이어지는 철학의 맥을 여기서 연상하게 될 줄이야.
죄책감도 깨달음도 그들과 그 부모의 일. 왜 그랬는지도 그들의 일. 나는 우선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나를 모르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어찌 보면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아들의 바람이 비수처럼 꽂혔다. 고맙게도 아들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아들의 흠도 직면할 용기를 갖고, 피해 상황과 아들의 요구 사항을 정리하고, 선생님 입회 하에서 상대방 부모 면담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야기할 내용을 준비했다. 진심일지 의심스러운 사과조차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그 못된 행동을 중지시킬 수 있기만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