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장
"…지한."
보호소의 축축한 나무 바닥 위에 웅크리고있던 지한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하루이틀 지났는데, 수십 년만에 듣는것 같은 그리움이 일었다. 행여나 그것이 환상일까 두려워,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지한의 기억 속 그대로인 친구들의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이곳에 오기까지 꽤 많은 일들을 겪었던 모양이다. 깔끔했던 교복은 어느새 누더기가 되어있었고, 하얗던 얼굴들은 여기저기 긁히고 흙빛이 되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여전히 총기가 가득했다. 보호소에 도착한 것에 대한 안도감과 희망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야‥ 강지한. 진짜 너 맞냐?"
왼쪽 뺨과 턱 아래에 긁힌 상처가 선명한 반장 준우가 무리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겨우 몇 발자국 다가오는 동안에도 고통을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오른발을 절뚝거렸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다른 친구들의 상태는 꽤 양호한 것으로 보아 반장은 끝까지 자신이 맡은 책임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미친,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지한은 반장 준우의 어깨를 조심스레 부축하며, 친구들 하나하나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여느 때의 교실에서와 같이 친근한 인사가 오갔다. 간신히 현실감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지한 씨, ‥잠시만 이쪽으로."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누군가의 부름에 지한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지한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조대 특유의 붉은 셔츠. '구조'라는 글씨가 선명한 검정조끼를 입은 남자. 보호소 책임자 송태영이었다.
입구 옆. 비상구 문의 그늘진 구석에 서 있던 그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친구들에게 눈에 띄지 않도록, 그의 눈에만 보이는 각도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지한은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태영은 전에는 본 적 없던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람도. 반가움도. 안도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날이 서 있었다.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눈빛이었다. 지한은 곁에 있는 준우를 흘긋 돌아보았다.
"잠깐 화장실 좀."
작게 중얼거린 다음 친구들 눈을 피해 태영 쪽으로 향했다. 준우는 "똥 싸러 가냐?"라고 농담을 던진 뒤 한 발 물러났다. 지한은 작게 실소를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비상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호소 안의 공기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아 불안감이 상승했다. 여기서 뭘 더 겪어야 하는 걸까, 아직도 지한이 넘어야 할 고비가 남았다는 것일까. 그것이 부디, 하연과 관련된 것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두꺼운 철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등 뒤로 친구들과 보호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깊은 적막만이 지한과 태영 사이를 짓눌렀다. 비상등 하나가 켜져 있는 어두운 복도. 불길한 녹색의 빛이 천천히 회색의 긴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웠다. 태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벽에 등을 기대며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지금 말하는 건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됩니다."
지한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투와 눈빛은 장난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군인의 그것이었다.
"하연 씨가… 성산대교 북단에서 발견됐습니다."
지한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소용돌이치며 흐려졌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차가운 복도 벽을 짚었다. 줄곧 엄숙했던 태영의 얼굴에서 잠깐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쳤다가, 진지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경찰 병력에 포위된 상태입니다. 군대까지 투입된다면, 사살 명령도 사실상 진행된다고‥"
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두운 복도 안을 유영하듯 흔들리던 두 그림자가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모습을 감추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비상구 문이 덜컥 열렸던 것이다. 동시에 지한의 분노는 누군가의 등장으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대체 누구 맘대로요? 하연이가 무슨… 그딴."
두 사람의 은밀한 접선이 이루어지던 비상구 복도에 익숙한 얼굴이 머쓱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여전히 당찬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우뚝 선 준우가 태영과 지한을 번갈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뭐야, 똥 싸러 간다더니. 둘이 여기서 뭐해요?"
준우의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장난스레 웃으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자, 공간을 감도는 어색한 공기를 읽은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둡고 축축한 복도. 지한은 차가운 벽을 짚은 채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태영은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등을 문에 기댄 모습이었다. 불안과 무거운 침묵이 복도 안에 고요히 깔려 있었다.
"…어라, 분위기 왜 이래요?"
준우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장난으로 던진 말은 허공에 부서지고, 말끝은 어색한 공기에 삼켜졌다. 태영은 지한을 잠시 바라봤다. 말하지 않겠다는 침묵이 그 짧은 눈빛에 담겨 있었다. 지한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정을 꾹 누른 채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냥…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온 거야."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바람? 창문도 없는 이런 곳에서?"
준우는 턱을 쳐들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탐색하듯, 커다란 눈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야, 빨리 돌아가자. 네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다들 찾더라. 하루도… 꽤 걱정하던데?"
그 말에 지한의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하루. 그 이름은 짧았지만 강한 힘으로 마음을 울렸다. 지한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먼저 들어가. 나 금방 갈게."
준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의심스러운 눈길. 하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더 이상 장난칠 분위기는 아니었다.
"…뭐야. 나 몰래 생파라도 준비하려고 그러냐?
아, 내가 눈치가 없었네. 참고로 난 무조건 시나몬 케이크다. 알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은 여느 때처럼 농담이었지만, 짐짓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한은 무표정하게 손을 휘적이며 짧게 대꾸했다.
"됐거든. 얼른 가라."
준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두 사람을 쓱 훑어보고는, 낮은 한숨과 함께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복도에는 다시 침묵이 깃들었다. 철문이 '덜컥' 하고 닫히는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다. 한참 후, 태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낮고, 무거워져 있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게‥ 하연 씨가 성산대교로 오기 전에 나리공원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태영은 계속해서 머뭇거리면서 뜸을 들였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 걸까 심히 걱정되는 모양새였다. 지한은 아직 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준우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탓일까. 방금 전처럼 당장이라도 뛰어들 태세는 아니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라도 된 건지 태영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피해자가 ‥지한 씨 부모님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지한의 시간이 멈췄다. 뭔가가 ‘철컥’ 하고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눈앞은 여전히 어두운 복도였고, 비상등의 희미한 녹색 불빛은 그대로였지만, 모든 색이 죽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귀가 먹먹해졌고, 태영의 마지막 말은 물속에서 들은 것처럼 뭉개져만 갔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날뛰었다. ‘하연이’라는 이름과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겹치며 뒤엉켰고,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그 모든 생각 위에 두껍게 내려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연이 부모님을? 왜? ―어째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127번 버스 안. 백하연. 도망치듯 달렸던 뒷모습.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 그 모든 것이 퍼즐 조각처럼 맞물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해는 더더욱 멀어져 갔다.
"…거짓말이지."
지한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태영에게 말하는 건지 본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부정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마음속에 피어오른 진한 고통이 말보다 먼저 눈시울을 찔렀다. 지한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손등으로 눈을 가렸지만 애석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비어버린 것 같았다. 텅 빈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 부모님의 얼굴도 하연의 모습도 아닌, 귓가를 긁는 기이한 정적뿐이었다.
지한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영도 존재를 지우듯 그림자처럼 지한의 곁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하연이는… 내가 지켜봐 주어야 해. 그 애 잘못이, 아니야‥."
마치 세뇌하듯,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지한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자신이 무너지면 하연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데려다주세요. 성산대교, 하연이‥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