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뜨거운 여름 공기에 아스팔트 도로가 이글거렸다. 바로 거기서 술에 취한듯 누군가 비틀거렸다.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 쓴 여학생. 그녀의 눈빛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름끼치는 살기가 느껴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상처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진공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연아!”
지한의 다급한 외침이 도로를 따라 질주했다. 저기 하연이 있었다. 몰려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뻔 했다. 그러나 하연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 굶주린 짐승처럼 극장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유독 작은 체구의 어린 소녀, 하루도 있었다.
그 아이는 하연의 여동생이었다. 올해로 중학교에 입학했었다.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마주쳤었다.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웃음이 인상적이었다.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꺄륵대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럴 때면, 하연이도 그렇게 나를 귀찮게 해주기를 바랐다. 순간 하연의 시선이 하루에게 향했다. 괴이한 핏줄이 돋아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안돼―!”
지한이 망설임없이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짓이겨질 듯한 갈비뼈. 욱신거리는 어깨. 찢어진 복부의 통증. 그것들이 한번에 몰려왔다. 자동으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질거야.”
지한은 바들바들 떨리는 하루를 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순간 눈앞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후드 안에 얼굴을 반쯤 감춘 하연이,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무언가를 말하려는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끊기듯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하연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그 눈은 지한이 기억하는 것과는 달랐다. 지한은 하루를 등 뒤로 숨기고,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하연과 마주한 거리는 팔 하나만 뻗으면 되었다.
“하연아… 이제 집에 가자.”
지한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하연의 눈동자가 잠깐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안에서, 눈부신 여름 오후에 흘리던 땀방울 같은 무언가가 반짝였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하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 움직임엔 아쉬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래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 한마디가 닿기만 한다면. 단 한 마디면 됐다.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거친 손이 느껴졌다.
검정색 재킷을 입은 소방구조대원이었다. 낯선 사이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뒤따라 온 구조대원 셋이 합류했다. 그중 누군가 "대상확인!"을 외쳤다.
“위험하다! 움직이지 마!”
“안 돼! 하연이를… 두고 가지마…"
지한은 거세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건장한 구조대원 두명이 그를 붙잡고 끌어냈다. 지한은 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멀어졌다.
낯선 천장의 누런 형광등 불빛이 깜빡였다. 악몽이라도 꾼듯, 불규칙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시트에서 땀과 먼지 냄새가 섞인 곰팡내가 났다. 옆에는 하루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다친데는 없는지 조심스레 확인하고 나서야, 지한은 천천히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곧이어 낡은 철문이 힘겹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신 드셨네요. 강서구청 건물 지하의 임시 보호소입니다."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말끝에 맺힌 피로가 이들의 상황을 짐작케 했다. 지한은 고개를 들어 말한 이를 바라봤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검은 조끼에 구조 마크가 달려 있었고, 눈매는 예리했다.
"저는 송태영이라고 합니다. 강서구 보호소 임시 책임자입니다."
"…강지한입니다. 그 아이는… 하루라고 해요. 이웃이고요."
"사거리에서 난동 부리던 학생, 그쪽이랑 관련 있습니까?"
지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입술을 깨물었다. 태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영을 마주보았다.
"… 하연이에요. 그 아이 이름은."
"가족입니까?"
"아뇨. 친구― 요."
태영은 잠시 침묵했다. 힘을 잃어가는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눈도 살짝 흔들렸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걱정해 주는 친구도 있으니."
지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보호소 안을 둘러봤다. 군데군데 찢어진 텐트천. 금이 간 벽. 그리고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들의 기척. 누군가는 아이를 달래고 있었고, 누군가는 보급용 캔을 따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 모두가 부서지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내가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이번엔… 절대로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결국 형광등이 꺼졌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호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져가는 도시의 어딘가 누군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