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거리(距離)

―05

by 유성

새빛 아파트 107동. 07:00.

백하연의 집 안.


“아니, 그러니까― 언니는 아무 말 없잖아, 응?"


또 저 표정이다. 어른들이 못 이기는 걸 너무 잘 안다. 뻔하지만 늘 통하는 수법, 계산된 천진함. 멀찍이서 보고 있자니, 흔한 일일 시트콤이 따로 없다. 거실 구석,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부엌은 밝고 따뜻했다. 아일랜드 탁자 주위로 퍼지는 웃음소리, 동생의 투정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화기. 나는 거기 없었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가끔은 저게 부럽다.


새빛 아파트 107동. 07:15.

15층. 엘리베이터 앞.


주홍색 디지털 숫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3을 지나―14, 그리고 마침내 15를 만들었다. 매일 보는 숫자지만, 오늘은 유독 느리게만 느껴졌다. 늦은 것도 아닌데, 썰렁한 냉기를 머금은 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으려니 어딘가 어색했다. 갈 곳 잃은 두 손이 구겨진 치맛자락과 아방한 검정 후드티 자락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현대인이란, 휴대폰 하나 없으면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 불안해진다.


"하,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거람."


서늘하고 창백한 얼굴, 도톰한 입술 사이로 무심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출석 부를 때 말꼬리가 꼬이지 않게, 미리 입에 익혀 두는 습관 같은 거였다.


여름이었지만 복도는 쌀쌀했다. 아니―조금 춥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이 공간은 미워할 수 없다. 띵— 하는 기계적인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언제나 똑같은,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날 맞아주는 유일한 존재. 오늘도, 시작이구나.

짧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숫자는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다, 5에서 멈췄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은 반 여자애들 말로는, "강지한, 오늘도 미쳤음. 존잘." 그리고― "지한이? 걔는 네가 가질 수 없어. 공공재야. 나라에서 보호해야 돼." 뭐, 대충 그런 소리였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배려심 깊고, 눈치까지 빠른 성격. 이쯤 되면 인간적으로 싫어하기가 더 어려운 타입이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강지한이라는 존재는.


"안녕, 오늘도 만나네. 우리 좀 인연인 듯?"


그 특유의 가볍고 자연스러운 말투. 별일 아닌 것처럼 다가오는데, 보면 어느새 거리라는 게 희미해져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강지한에게 붙는 온갖 수식어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게 지한은 좀… 뭐랄까. 푼수 같기도 하고. 능글맞달까. 괜히 경계심이 풀리는 사람. 능구렁이, 여우― 그런 쪽에 가깝다.


"어, 응… 안녕."


최선의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의 같은 반 친구라면, 적어도 이렇게 말하진 않았겠지. 그럼에도 내 입에선 그런, 형식적인 대답이 나왔다. 반대편 구석에 서 있는 지한은, 그런 말에 실망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상처도, 불편함도 없어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어쩌면 고마워해야 할지도. 그렇지만 그 말조차,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그렇게 좋은지, 그는 천진하게 웃으며 홍당무처럼 벌게진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나는 잠깐 숨을 참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너란 사람은.


1층 복도로 빠져나오자, 냉랭한 한기가 서서히 몸을 감싸 안았다. 조금 전까지 몸을 감싸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마치, 짧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처럼.


아파트 현관과 현실의 경계를 가로막는 얇은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자, 그 모습 또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같은 반은 물론, 다른 학년의 여학생들까지 작은 현관에 우르르 모여 있었다. 마치 동물원 우리 속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우리를 비추는 조명은 늘— 오직 지한에게만 향하는 것 같았다.


"가자. 늦겠다."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강아지 같은 얼굴.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다른 여학생들이 아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정말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중앙고등학교 도서관. 12:20.

점심시간 종료 10분 전.


소설이란, 내게 또 다른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과학 시간에 졸면서 들었던 ‘평행우주’ 같은 것. 다른 세계의 나는, 연예인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은 늘 즐거웠다. 굳이 애써 의미 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한 번뿐인 인생을 여러 번 사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답답한 직사각형 교실들 사이,

이곳은 내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약자를 돕는다. 뻔한 클리셰지만, 그만큼 효과가 좋다. 사람들은 정의롭고 이타적인 영웅을 원하니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때론 눈물 날 만큼 우습다.


그런 걸 보면, 강지한이란 존재는… 주인공 자리에 너무 잘 어울린다.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와 신념은 또렷하고. 세상과 살짝 어긋난 약자들을 놓치지 않고 챙기고, 어쩔 땐 절망에 빠진 공주 앞에 환상처럼 나타나기도 하니까. 딱, 백마 탄 왕자님처럼.


"넌 참, 대단해. 난 한 줄만 읽어도 잠이 오던데. 진짜 멋있어, 진심."


방금 전까지 운동하다 온 건지,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흩어진 짧은 머리카락이 도서관 에어컨 바람 아래 살짝 흩날렸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엔 어울리지 않게, 그 애는 항상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들뜬 강아지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튈 듯한, 그런 기분 좋은 불안정함.


저런 말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맞는 걸까. 딱히 내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한여름 해처럼 생글거리는 그 얼굴 앞에서—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했던 것일까. 결국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설 속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 까만 활자를 눈으로 좇았지만, 더 이상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한과는 도무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딩- 동- 댕- 동-


5교시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도서관 벽면을 타고 가볍게 튕겨 나갔다. 보통이라면 그다지 반가울 리 없는 소리지만, 지금 내겐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맞은편의 지한은, 반대로 언뜻 스친 미소 속에 묘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나는 의자가 바닥을 긁지 않도록 조심히 밀고 일어났다. 지한은 말없이 책을 반납하고,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이지, 강지한이 강아지라면― 충직한 셰퍼드 일지도 모르겠다.


별관 5층. 16:40

영화감상부 동아리실.


한 치의 햇빛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꼼꼼히 가려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커튼 자락이 느릿하게 흔들릴 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고요하고 어두운 공기가 교실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교실 맨 앞 모니터에선 인셉션이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영화에 집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이곳, '영화감상부'라는 이름만 보면 누구나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영화는 핑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시원한 교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멍하니 시간을 보내려는 학생들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이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동아리 중 하나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유는 명확했다. 깜깜한 교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낮잠을 자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 완벽한 조건. 나 역시 그 이유로 이곳에 앉아 있었고, 대부분이 그랬다.


하지만, 내 옆자리에 앉은 이 아이는— 그 틀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 1학기까지만 해도, 강지한은 축구부 소속이었다.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는, 건물 내부의 에어컨바람보단 선선한 자연의 공기가 어울리는. 그런 그가, 굳이 자리가 텅텅 빈 교실 안에서 내 옆을 골라 앉아,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시작부터 내내 가만히 있질 못했고, 안절부절, 마치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너무 깊은 정적이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말문이 막힌 얼굴이 어쩐지 조금 안쓰러웠다.


"… 일어났어? ‥나, 심심해."


결국, 고요를 깨고 지한이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나, 대답을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끊임없이 관심을 구애했고, 나는 그 관심을 받는 것도, 되돌려주는 것도 영 서툴렀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영화를 보고 싶은 건지 강지한을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의 일방적인 존재감은, 내게는 너무도 큰 벽이었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그 마음이— 너무 벅찼으니까.


교실. 20:10.

야간 자율학습.


아침부터 봤던 교실 풍경. 달라진 건 네모 반듯한 창문 밖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는 것뿐이었다. 뜨겁던 해는 이미 사라지고, 밤하늘엔 둥근달이 떠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학교 안에 갇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쳤던 학생들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고, 눈빛들엔 하나같이 공허함만이 감돌았다. 이제 여긴 더 이상 학교가 아니었다. 마치… 아즈카반의 디멘터에게 영혼을 빨린 사람들처럼, 모두가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복도를 지나며 도망치는 학생들을 감시하던 학년부장 선생님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던 교실 안에서 누군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신호탄이었는지, 정적에 짓눌려 있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풀려나갔다. 방금 전까지 감돌던 침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교실은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야, 백하연. 이거— 네 거지?"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 위로 날카롭게 뻗은 콧대, 길고 가는 눈매. 탈색한 투블록의 뿌리는 검게 자라나 있었고, 교실 조명 아래선 은색 피어싱이 번들거렸다. 이목구비만 보면 딱, 불량해 보이기 좋은 얼굴. 이름이… 박승호? 박성호? 뭐,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하여튼 확실한 건, 그가 나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다는 사실. 비죽 올라간 입꼬리엔 조롱이 섞여 있었고, 느긋하게 휘젓는 손에는— 어제 하교 이후로 보이지 않던, 낯익은 하얀 아이폰. 장식 하나 없는 그 폰은, 틀림없이 내 것이었다.


"돌려줘."


악의도, 호의도 없는. 그저, 말 그대로의 의미만 담은 무심한 말투였다. 나는 박승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휴대폰에 닿기도 전, 박승호는 마치 우스운 걸 봤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싫은데?"


짧고도 단호한, 조롱 섞인 한마디였다. 그리고 곧, 눈웃음으로 감춰졌던 그의 눈매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목소리는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묘하게 압박이 느껴지는 톤이었다.


"돌려받고 싶으면, 성의를 보여야지. 일단… 강지한한테 고백하고 와."


박승호가 강지한이랑 친했던가? 아니다. 절대 아니었다. 둘은 말도 섞은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유흥거리일 뿐. 재미 삼아 건네본, 잔인한 장난. 그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떠 있었지만, 그건 강지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미소였다. 천진함을 닮았지만, 완벽하게 순수하지 않은 표정.


이를테면… 순수한 악의.

지루한 야자 시간을 깨울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낸 아이의 얼굴이었다.


"내가, 왜…"


무어라 덧붙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혔다. 저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렸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자, 금세 비릿한 피맛이 번졌다. 소리치고 싶었다. 주먹을 날리고, 박승호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던지고 싶었다. 아니면… 그가 했던 것처럼. 시니컬한 미소 하나로,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런 건 애초에 내 방식이 아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나는 여전히, 마른침만을 삼키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눌러 담았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치듯. 하지만… 마음이라는 곳에도 용량 제한 같은 게 있는 걸까? 아무리 눌러 담아도, 더는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점심시간에 지한과 함께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현실의 감정은 더더욱 하연을 조여왔다. 숨 막히게, 날카롭게. 하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교실 안을 기묘하게 울렸다. 비틀거리는 걸음. 하연은 박승호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승호, 아니 박선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씨, 너 미쳤어?“


선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하연을 향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내— 박선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고 가냘팠던 하연에게서, 선호는 무언가 낯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살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본능적인 공포. 두 다리는 후들거렸다. 숨조차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좀비처럼 비척이며 다가오는 하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눈 안에서, 박선호는 분명히 느꼈다. 살의를.


교실은 더 이상, 단 한 줄기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꿈인가— 그것보다 훨씬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존재감 없던 여학생. 몇몇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매일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가던 그 아이가— 지금, 교실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남학생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에게 쫓겨 구석에 몰린 쥐가, 죽기 직전 마지막 발악으로 덤벼드는 것처럼. 하지만 그 발악은 예상 밖이었다. 고양이는 무릎을 꿇었다. 몸을 떨며 웅크린 채, 살려 달라는 말만을 되뇌었다. 어느새, 쥐와 고양이의 자리는 뒤바뀌어 있었다.


쥐가 된 고양이. 그 애처로운 울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주도권을 쥔 쥐는, 무력한 고양이의 목덜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하연아!"


기척조차 없던 교실,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백하연의 팔을— 누군가가 조심스레, 따뜻한 온기로 감싸 안았다. 강지한이었다. 그들과는 제법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교실 맨 앞자리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유일한 존재. 줄곧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무대 위로 걸어나왔다.


"괜찮아. 숨기지 않아도 돼. 말하지 않아도 돼. —도망치지만 말아줘."


지한은 두렵지 않았다. 이 교실에서 자신만이 하연을 멈출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가슴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야기의 중심은 바뀌었다. 지금 이 장면에서— 진짜 주인공은 강지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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