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강서구청 지하에 마련된 임시 보호소는 학교 강당정도의 크기였는데, 이미 사람들은 포화상태였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부상자들의 붕대를 감는 봉사자들과 우는 아이들, 도시락 리필을 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삐걱대며 화음을 쌓았다. 그들 모두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방랑자였다. 그리고― 모든 것의 원흉, 백하연이 그곳에 도착했다.
태영의 손에 붙들려 보호소에 들어선 하연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녀는 더 이상 괴물의 눈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창백하고 가녀린 평범한 여학생처럼 보일 뿐이었다. 보호소의 누구도, 이 소녀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 분명했다.
"‥다, 저 때문에…"
순간, 태영은 목소리의 출처를 의심했다. 빗 속의 가여운 강아지 같은 애처로운 음성, 짧은 문장이었지만 불안정한 높낮이의 ―조율되지 않은 어쿠스틱 기타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 그렇지 않아. …지한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야. 어서 친구들 만나러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지한'
태영은 그 이름을 말할 때 하연은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보호소 안의 사람들 체취와 함께, 오랜 친구의 마지막을 고하듯 아련한 기분이 밀려왔다. 응급구조팀의 동료에게 들은 바로는 지한은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물론, 시기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아이는 분명, 다시 일어설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태영이 본 소년은 그리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더구나, 그의 옆에 서서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호소를 바라보는 소녀… 하연을 두고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안다.
"태영 아저씨!"
"나 아직, 아저씨 아니거든?"
"아저씨잖아요! 서른 살 넘었다면서요!"
"그래, 맘대로 해라."
보호소의 가장 끝, 비상구 앞에 하연 또래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성산대교로 향하기 전에 잠깐 마주쳤던 지한의 학교 친구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조금 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자연스럽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선이 고운 큰 눈과 뽀얀 피부, 도톰한 입술이 누가 봐도― 하연의 동생이었다. 오빠들 틈에서 리더 노릇을 하고 있던 작은 하연이 그들 곁에 다가온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큰 눈이 더 커졌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태영을 지나쳐 하연에게 안겼다.
"언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엄마도, 아빠도 금방 오신대."
"… 미안해"
숨이 막힐 정도로 하연을 감싸 안고 한참을 흐느끼는 하루였다. 동생의 품 안에서 하연은 그저, 목이 메인 채 그렇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를 바라보던 남학생들과 태영도 그 순간은 함께, 숨을 죽이고 남몰래 눈시울을 붉힐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요한 평화를 깬 건, 장난기 어린 얼굴에 확연히 드러난 걱정 어린 표정의 반장 준우였다. 지한과 성산대교로 향하려던 때, 함께 가겠다며 따라나서려던 소년이었다.
"아저씨, 강지한은요?"
다시 한번, 태영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엔 오랫동안― 묵직한 감정에 숨이 턱 막혀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지한과 함께 보호소를 나서면서 이 소년에게 태영의 입으로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었다. "꼭, 같이 올게." 라니. 빌어먹게도 그 말은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변명같이 들릴 것이 뻔했다. 한동안 대답이 없는 태영을 보며 준우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안 죽었잖아요. 그럼, 얘기해 주세요."
처음 보았을 때의 개구쟁이 같은 당찬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분노와 슬픔 어딘가에서 헤매는 듯 곱게 뻗은 손가락이 떨리는 게 보였다. 이내, 준우는 고개를 들어 태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에 휘몰아치는 원망, 분노―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의 빛 또한 일렁이고 있었다. 누구든 그런 얼굴 앞에서 거짓말을 하긴 힘든 법이다.
"지한이잖아. 죽지 않을 거야. 그냥, 같이 오지 못했어. 미안하다."
어느덧 태양은 황금빛으로 생기를 잃은 도시를 비추었다. 도로에는 움직이는 차는 없고 불타거나 부서진 것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 있었다. 불과 이틀 전에는 북적였던 상점가엔 사람들이 없었고 유리창은 깨져 있었다. 일상을 보내던 이들은 모두, 건물 지하에 몸을 숨겼다. 도시 저편의 어딘가 연기가 타올랐다. 시끄러운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 소방차와 경찰차들만이 죽어버린 회색 공간을 애처롭게 채워갈 뿐이었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태영과 동료들이 종종 담배를 피우며 농땡이를 쳤던, 하얀 플라스틱 의자 두 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의자 아래 떨어진 담배꽁초와 먹다 남은 맥주캔을 흘긋 보던 하연이 말을 멈추고 태영을 흘겨보았다. 왜인지 실망하는 눈빛에 태영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이의태라고 애주가 동료가 있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늦지 않았어. 마음먹은 때가 가장 좋을 때지."
태영을 바라보던 하연의 눈이 다시 존경과 놀람으로 바뀌었다. 마치,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네요."라고 말하는듯한 눈빛이었다. 둘 사이에 많은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낡은 옥상의 녹슨 페인트 냄새에― 조용히 앉아 동시에 한 소년을 떠올렸다. 소중한 것을 지켜내었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고요한 평화에 새롭게 떠오르는 다음장, 이건 마치, 해피엔딩을 향한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끝엔― 진짜 주인공이 등장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도망치지 않을게요. …소중한 게 뭔지 알았으니까. 지킬 거예요."
하연의 목소리는 더 이상 부서질 듯 가냘프지 않았다. 마침내 조율이 끝난 기타는 완벽한 선율로 희망을 연주했다. 태영을 향해 미소 짓는 하연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소녀의 밝은 미소에서 벅찬 감정을 느꼈다. 더 이상 하연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렇게나 예쁘게, 바라만 봐도 걱정이 사라지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가? 어쩐지 지한이 생각나는 미소였지만 그와는 다른― 한겨울의 꽃송이와도 같았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태영에 하연 특유의 수줍음이 스쳤다. 조금, 어색해진 하연이 주머니에서 뽀시락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청포도 사탕이었다. 조용히 하얀 손에 쥐어진 초록색 사탕을 내려다보던 하연이, 아주 느리고 아름답게 시를 낭독하듯 읊조렸다.
"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런 적 없었어요. 제가 외면했을 뿐‥ "
어디선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날려온 노란색의 구겨진 포스트잇 조각이 ―가로수의 은행잎처럼 하연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땅으로 떨어졌다.
"강지한이… 늘 곁에 있었는데‥ 계속, 외치고 있었겠죠. 알아봐 달라고― 그럼, 제가 알아봐 주겠다고요. 이제 제 손을 잡을 차례예요."
하연이 생긋 미소를 짓는 순간, 태양이 반짝― 하연을 향해 환한 조명을 비추었다. 그건 마치, 하연만을 위한 무대 장치처럼 보였다. 이 영화의 엔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