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차량통제선 안, 수십 명의 경찰과 군인들이— 한 소녀를 향해 발포준비를 마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의 밤, 한강에는 꺼지지 않은 빌딩의 불빛이 강 줄기를 따라 흘렀다. 대교 위의 서늘한 피냄새는 금세, 강바람에 씻겨 날아가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짐승에게 뜯긴듯한 살점에 흐르는 진득한 피, 축 늘어진 시체들 위에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앳된 얼굴을 한 소녀가 기괴한 표정으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심하게 구겨지고 찢어졌지만 그것은 분명 교복이었다. 하얀 와이셔츠, 회색 니트조끼, 같은 색의 체크무늬 치마까지. 차마, 저 소녀가 순식간에 서울을 피바다로 만든 장본인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어린애잖아. 하지만 명령은 단호했다. 저건, 아이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산다고.
"항복해라! 손들고, 천천히 이쪽으로 와!"
확성기를 들고 소녀를 향해 소리치는 저 경찰관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 조금씩 갈라지는 목소리… 수십, 수백개의 총구에서 붉은 레이저가 소녀를 향해 발포 명령을 기다렸고, 어느 콘서트장의 조명보다 밝은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단 한 소녀를 향했다.
도시를 위해 소녀는 사살되어야 했다. 분명히. 그런데 어째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헤친 괴물에게서― 그토록 애달프고 순수한 고독이 느껴지는 것일까. 저 소녀는, 정말로. 괴물인가? 일개 말단 경찰인 내게 그걸 판단할 의무는 없었다. 곧이어, 기나긴 침묵 끝에 대교 위를 시끄럽게 비행하던 헬리콥터가 저만치 사라졌을 때, 무전을 마친 확성기를 든 경찰이 오랜 침묵 끝에, 무거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 쏴라, 사람은 살려야지."
소녀를 겨누고 있던 총구들에서 동시에 붉은 섬광이 터졌고, 귀를 찢는 총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누구라도 저런 총탄을 맞는다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총탄이 살을 찢는 끔찍한 소리와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그 순간 대교 위의 모두가 눈을 감았다.
짙은 화약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사냥꾼들은 일제히 사냥감을 향해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확성기를 든 사내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떨리는 눈빛이 방금의 총성으로 생긴 듯한 피 웅덩이를 향했다.
"여자애가… 아니잖아."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자꾸만 머릿속에선 최악의 상상이 떠올랐다. 설마, 벌써 하연을 쐈으면? 정말로 하연이 죽는다면? 아, 아니야. 지한은 자신을 세뇌하듯 자꾸만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지로 삼켰다.
"하연이는… 죽지 않아. 그럴 리, 없잖아."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고, 허벅지 근육은 불타는 감각이었지만 지한은 멈출 수 없었다. 성산대교로 향하는 차량통제선 앞에서― 한강공원 주차장까지가 우리의 한계였기 때문에, 대교까지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어쩔 거냐는 태영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없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경찰과 군인들 앞에서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하연이는, 괴물이 아니라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순간, 얼마 전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웃으면서 얘기했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아니야. 그게― 하연이 잘못이 아니잖아. 그래야만 해. 아니라면…
'멍청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어느덧, 대교 입구에 다다랐다. 노란띠에 붉은 선이 그어진 출입통제선을 넘고, 밤하늘의 단 하나의 별처럼 밝게 빛나는 조명― 그 중심에 하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백하연! 여길 봐. 그만하고… 나를‥"
이미 숨이 끊어진 시민들을 밟고 짐승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건, 분명 하연이었다. 이제 열 발자국도 남지 않은 거리, 숨을 들이켜자 비릿한 피냄새에 헛구역질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부신 조명 너머를 애써 의식하지 않고, 떨리는 두 다리를 달래 가며 하연을 향해 걸었다. 제발, 도망치지 말라고. 여기, 내가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하연에게 손 끝이 닿기 직전, 저 멀리서 확성기 특유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항복해라! 손들고, 천천히 이쪽으로 와!"
눈앞의 하연은 그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짐승의 그것처럼, 자신이 사냥한 인간들 위에서 멍하니― 조명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과연, 경찰의 말대로 항복을 위한 고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연아‥"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기 때문일까. 하연이 천천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에 진득한 핏덩이가 입가에 매달려 있었고, 가녀린 손등에 돋아난 괴이한 핏줄까지― 버스 안에서 보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감정 없는 죽은 눈을 한 하연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행복도, 슬픔도 아닌 어떤 것이었다. 가슴 깊이 무언가 벅차올랐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도 고독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 얼굴 앞에서 난, 말을 잃었던 것 같았다. 그저, 마주 잡아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세상은 마치 슬로 모션을 건듯, 둘만의 촬영장이었다. 불규칙한 짐승의 숨소리가 심장을 옥죄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하연은 여전히 날 바라보았고 그녀를 향해 내민 손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하연이 스스로 나에게 의지 할 수 있게 기다릴 뿐이었다.
어릴 적엔 친구를 사귀기 위해 달콤한 간식 하나면 충분했었던 것 같다. 몇 살 때까지 그런 수법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건 그저, 눈앞의 하연이 예전의 그 '백하연'이 맞다면 분명― 외면하지 못할 걸 확신하는 나의 멍청한 수사 기법일 뿐이다. 계속 하연의 눈을 마주치며, 내밀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어느 것이 나올지 몰랐지만 확실한 건,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리라.
뽀시락 거리는 비닐소리와 함께, 내민 손과 나란히 다른 쪽 손을 펼쳤다. 거기엔― 청포도 사탕이 있었다. 이성이 남아있었던 걸까. 아니면, 간절함에 대한 보상인 걸까. 마치 데자뷔를 겪는 듯, 하연의 가녀린 손이 나의 손바닥을 덮었다. 피 묻은 그 손은 분명, 차가웠지만 그 순간 지한에게는 무엇보다 따듯한 온기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예전처럼 말려 올라갔다.
"다행이다, 고마워… 이제, 집에 가자."
지한은 조심스럽게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여덟 살,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소녀를 붙잡듯 수십 개의 총구가 향하는 레이저 끝에서 하연을 마침내, 구해냈다.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그들 머리 위로 꽃가루를 뿌려주는 것 같았다. 하연은 여전히 짐승의 행색이었지만, 더 이상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대교 위, 두 소년과 소녀는 마침내 평화를 되찾는 듯했다. 손을 마주 잡고, 집으로…
탕―
운명은 그들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수십, 수백 개의 총구에서 불꽃이 번쩍이는 걸 먼저 본 건 소년이었다. 확장된 동공, 계산되지 않는 몸놀림으로 소년은― 소녀를 감싸 안고 대교의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시체가 쌓이지 않은, 누군가 버리고 간 승용차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쉬는 소년이 본능적으로 품 속의 소녀를 확인했다. 입가에 묻은 핏자국 외에 다친 구석은 없었다.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흐르자, 소년은 이전의 고통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통증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살을 찢고, 불로 지지는 고통 속에서 소년은 다시 한번 죽음을 직감했다. 이번엔, 진짜다.
"도, 도망쳐. 난… 괜찮아."
순식간에 창백해져 가는 낯빛으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은 누구에게도 전해 질 수 없었다. 당황한 것일까, 아니면 놀란 것일까 알 수 없는 소녀의 표정 뒤로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는 경찰과 군인들이 보였다. 더이상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지한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했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면서도 하연을 거칠게 밀어 그들의 반대편으로 보냈다. 눈이 감기기 전, 그는 안도했다.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태영이 보였기 때문이다.
구겨진 교복,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창백한 피부의 소년이 희미한 숨을 내뱉으며 아스팔트에 쓰러져 있었다. 날개뼈 부위에 한방, 허벅지에 관통상으로 꽤 큰 부상으로 이미 많은 피를 흘린 후였다. 소년을 비추는 조명아래, 주변에 몰려든 경찰 병력들은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으로 무고한 소년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 신원 확인하고…"
확성기를 든 경찰이 무력하게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다, 멍하니 대교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분명, 총성이 들린 직후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달려왔다. 아마, 소녀를 데리고 간 것도 그 자겠지.
"내가, 잘못생각 했나?"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생각이 무거운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옆에서 소년을 옮기던 순경이 기계처럼 "아,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비로소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소년이 죽은 게 아니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향했을 뿐이다. 대교를 재건하고 청소하는 인력들을 제외하고는 순식간에 철수를 완료했다. 며칠간, 대교 위에는 피냄새가 빠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도 당분간은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