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번 심야버스

ㅡ01

by 유성

7월 17일 22:00

동화 차고지 방면. 정류장.


유독 축축하고 후덥지근했던 7월의 장마철. 온종일 하늘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드리웠고, 달과 별들이 기척을 감추었던 기묘한 날이었다. 마지막 생을 앞둔 반딧불처럼, 희미한 가로등만이 오래된 버스정류장을 비추었다.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 쓴 여학생. 잔뜩 인상을 찌푸린, 백하연이 핏기없는 입술을 물어뜯자 짭짤한 피가 배어나왔다. 어깨에 삐딱하게 걸친 베이지색 가방에는 가지각색의 인형들이 매달려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회색 체크무늬 교복치마는 제멋대로 구겨져 있었다.


오래된 가로등이 몇번 깜박이다, 금새 꺼지고 말았다. 짙은 어둠에 휩싸인, 여름밤의 도로에― 마을버스가 한줄기의 희망처럼, 환한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정류장에 가까워졌다.


녹이 슨 고철이 힘겨운듯, 쇳소리를 냈다. 하연이 버스에 오르자, 줄곧 무뚝뚝했던 기사가―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노려보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비틀렸다. 소녀의 운동화는, 최근들어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흰 러닝화였다. 그러나, 흙탕물이라도 밟았는지 거의 갈색에 가까웠다.


"학생. 신발 좀, 제대로 털어줄래?"


기사는 소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고심끝에 단어를 골랐다. 제 또래의 학생들은, 어른들의 부탁에 높은 확률로 짜증을 냈던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기사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는 혀를 차며 버스를 출발시켰다.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마치, 미라가 몇천년만에 걷는것 같았다. 소녀는 기이하게도, 정상적인 맥박의 리듬이 아니었다. 풀액셀을 밟은 것처럼 빠르다가도, 나무늘보만큼 느려지기도 했다. 스스로도 제어가 안되는지, 멈칫거리기 일쑤였다.


"학생. 위험하니까, 그냥 들어가서 앉아."


7월 17일 22:05

동화 차고지 방면. 심야버스 안.


백하연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부딪혔다. "참지마, 다 부숴버려." , "안돼, 그만 둬." 하연이 주먹을 쥐자, 그 손등에서 괴이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았다. 허기진 야수처럼, 허공을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그제서야― 버스 안 승객들이 일제히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때, 버스 맨 뒷자리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연과 같은 교복이었지만, 그는 얼룩도 구겨짐도 전혀 없었다. 하연을 향해 다가오면서도, 줄곧 바른자세를 유지했다. 대충 봐도, 모범생이 아닐수가 없었다.


"하연아, 백 하연―! 내 말, 들려? 나 알잖아. 강지한. 5층 사는…"


강지한은 래퍼처럼 횡설수설 관심을 끌기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하연의 공허한 짙은 밤색 눈동자가 승객들을 향하자, 내부의 공기는 얼어버릴듯 했다.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근처의 기사와 지한은 이미,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버스 밖으로 튕겨져나갔다. 그들이 날아간 바닥은, 울버린의 흔적처럼 거대한 균열이 나 있었다. 운전석과 앞유리는 순식간에 전부 박살이 났다. 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손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스 내부는 한순간에 패닉상태에 빠졌다.


백하연은 공포 위를 군림하는, 이세계의 마왕처럼 보였다. 절망은 더 큰 혼란으로― 승객들을 향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기사의 것인지, 지한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진득한 핏물이 톡. 톡. 불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7월 17일 22:10

동화 차고지 방면. 도로 위.


도로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고, 운전수를 잃은 127번 버스가 가여운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127. 네온사인이 오래된 가로등 아래에서, 픽 꺼졌다. 창문들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멀쩡한 것들은 공포영화의 한장면처럼 핏자국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버스 안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공허와 적막 속 도로 위를 추락하는 차가운 빗방울만이― 그들의 죽음을 기억했다.


지한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빠졌고, 고개를 드는것도 힘들었다. 다만 기억나는 건, 그와 눈을 마주친 하연이, 소름끼치게 웃었다는 것이다. 그게 정말로 하연이었을까.


몸속의 장기들이 다 터져나간것 같았다. 자꾸만 눈이 감겼지만 이대로 기절하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것 같았다. 할 수 있는건, 현실을 부정하는 것밖에 없었다.


10년 전, 8살.

강지한.


문득, 10년전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의 지한에게 세상은 그리 넓지 않았다. 15층 높이의 아파트 단지. 뒷산 초입의 공터 정도였다. 지한은 107동의 토박이였다. 그곳의 주민들은 이사가 잦았다. 그의 하루일과도 이삿짐센터 계단을 구경하거나, 또래친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입학을 앞둔 2월. 지한은 하연을 처음 보았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부모님 뒤를 졸졸 쫓아오던 수줍은 소녀. 그는 언제나 그 장면을 기억했다.


첫 등교날. 친구들에게 나눠줄 과일맛 사탕들을 양껏 챙겼다. 엘리베이터는 하필, 15층에 멈춰있었다. 지한은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다.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결정한 것은 꽤 운명 같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구석에 작고 하얀 소녀가 바닥만 보며 서 있었다. 지한은 곧바로 '15층 (예쁜)백하연'을 기억했다. 빨리 하연과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놀람과 수줍음 사이. 동그랗고 큰 두 눈을 천천히 끔벅이는 하연이었다.


"안녕! 나는 강지한이야. 이거― 먹을래?"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운 사탕봉지에서 나온 것은, 그 당시의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청포도 사탕이었다.


7월 17일 22:25

다시, 도로 위.


"학생! 정신 차려! 기절하면 안 돼!"


八자 눈썹을 가진 경찰이― 달콤한 잠에 빠진 지한의 의식을 현실로 끌어올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마다, 경찰은 거센 목소리로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하…연? 어디에…"


흐릿해진 시야 속에, 하연은 없었다. 대신, 종이처럼 구겨진 가드레일에 기괴하게 꺾인 기사님이 보였다. 그건 아마, 평생 그를 놔주지 않을것이 분명했다.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안했고, 정신은 물속처럼 흐릿했다.


사라지는 의식 끝에서, 지한은 떠올렸다. 하연을 찾는다.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헤쳐도, 강지한에게 백하연은― 지켜봐 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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