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겐 최부장은 알코홀릭-1

에세이

by 피터팬신드롬

‘8시?’


초록색 숨을 내뱉고는 눈을 떠보니 저만치 시계의 숫자가 믿기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내 달렸다. 얼굴을 보니 여간해서는 생기지 않는 칼자국이 왼쪽 이마에서 눈을 지나 콧잔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두시간으로 만들어진 자국이 아니었다. 자는 동안 얼굴이 저리지도 않았을까? 거울 속의 내 몰골이 말이 아니다.


‘집에 어떻게 왔지?’


맙소사, 필름이 완전히 끊겼었다.

양치는 치약 맛만 보고, 세수는 비누 없이, 머리를 겨우 감고는 옷방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간다. 간밤에 참 잘 벗어놨구나! 종유석처럼 서 있는 바지를 기가 막힌 듯 바라보고는 탈탈 털어 입고 보니, 8시 20분.


‘새 됐군’


가만 있어 보자, 핸드폰은? 시계는? 전자담배는? 미친 듯 어제 입고 있었던 옷을 뒤지는데, 세 가지 모두 없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다행히 잃어버린 것은 없는 것 같다. 모두 백팩 앞주머니에 구겨 넣어져 있었다. 아내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어제 술자리는 성공한 걸까? 어제의 기억이 이렇게 하얀 백지상태인데 잃어버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가 나를 챙겨준 게 틀림없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난 강남 유흥가 길바닥에서 싸늘하게 변싼체(?)로 발견됐을 수도 있었다. 혹은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지. 천신만고 끝에 휴대폰 찾기 프로그램 돌려서 찾았는데 시시각각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그란 원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남 과장이었을까? 최 차장이었나? 이 새끼들 평생 내가 챙겨줘야지.’


이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정신을 되돌려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은 출근이다. 빛의 속도로 버스 정류장으로 탁탁탁. 아 절망이다. 러시아워가 끝나갈 시간인가? 정류장에 사람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서 빨간색 광역버스가 도착했다. 8시 40분. 어차피 9시 30분도 훨씬 넘을 것으로 예상. 독사 같은 부사장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하는 것으로 목표 변경. 부사장이 도착했는지 문자로 남 과장에게 물어보려다 이내 관뒀다. 차마 창피해서 문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무능력한 팀장에, 술버릇도 지랄 같은 상사인 게 부끄러웠다.


어제는 회사가 뒤숭숭했다. 그래서 좃소기업이라고들 하는 건가? 연일 계속되는 매출 부진으로 이미 임원들은 한 달 전부터 급여 50% 삭감의 압박을 받고 있다며 생색이다. 이번 달부터 부장 40%, 차장 30%, 과장 20%. 그래도 대리 이하는 제발 고통 분담에서 빼달라고 읍소해서 받아들여져 다행이었다.


침울해져 버린 회사 공기. 조심스럽게 나오는 한숨 소리들. 하지만 우리 영업팀 에이스 최 차장은 묵묵하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내 회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사장이 엊그제 나를 술집으로 부르더니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부사장이 나에게 상품권 몇 장 쥐어지고는 지금은 회사가 힘드니 나더러 사장이란 생각으로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일해달라는 말을 했었더랬다.


뿌리쳤어야 했다. 사양했어야 했다. 하지만 손은 뿌리쳐지지 않았고, 신세X 상품권 10만원권 석 장이 안주머니에 어색하게 빨려 들어갔다.


난 부서장이지만 자격이 없었다. 난 간첩이었고, 채찍 든 감독관이었다. 최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차장, 이 마당에 무슨 영업이야, 회사 앞이야 노가리 집으로 와.”


4시부터 영업지원인 남 과장과 기술지원부서인 정 팀장을 데리고 나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최 차장도 6시부터 술판에 합류했다. 최 차장은 밝게 웃고 있었다. 가장 노력을 많이 하는 영업 에이스가 인센티브는 꿈도 꾸지 못하고 오히려 삭감이라니….


최 차장. IT업계에 늦게 합류했고, 또래 차장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늦게 시작한 이 바닥 영업 분야에서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몇 배 더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친구였다.


“미안하다. 조금만 우리 버텨보자.”

“최 부장님이 왜 미안해하세요. 괜찮아요.”


계속되는 몇 번의 건배사 제의. 쌓여가는 소주병과 맥주병. 술집 창가 너머로 석양이 부서지고 있었다. 말없이 눈물 훔치는 최 차장 얼굴이 부서지고 있었고 나의 기억도 부서진 것 같다. 평소보다 빨랐고 아주 깨끗하게.


헐레벌떡 회사 앞에 도착하니 5분 전 10시. 몇 가지 변명거리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회사 현관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철컹’


문이 잠겼다?


‘뭐야, 회사가 망한 거야?’


회사가 어렵다더니 진짜 망한 건가 싶어 마음이 더 다급해지는 순간, 설마 하고 휴대폰을 보니 오늘은 수요일인데? 아! 오늘은 근로자의 날. 그래서 정류장에 사람이 그렇게 없었구나! 어이가 없었다. 아 술을 끊어야지 백만 한번째 결심을 할 참이다. 이윽고 카카오톡이 울렸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어제 많이 취하셨어요. 오늘 해장 잘 하시고요.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세요. (술 취한 강아지 이모티콘)’


최 차장 문자였다. 좀 일찍 문자를 보냈어야지, 이게 웬 개고생이야.


‘상품권 고맙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최 부장님. ( 눈이 하트가 된 강아지 이모티콘)’


어제까지 꼬박 3일 동안 안주머니에만 있던 신세X 백화점 상품권이 빈 봉투만 남아있었다. 집에서 잃어버린 건 없는지 뒤적일 때도 안주머니에 있는게 불편했는데...

그래 이건 애시당초 내 것이 아니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팀원에게 미안한 마음을 마음으로만 갖고 있다가 얼마 안되는 상품권을 주고 나니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숙취로 어지러운 머리가 맑아졌다.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고 있었다.


‘간만에 아침 10시에 퇴근!’


퇴근이라 그런가?

또! 소주 한잔이 간절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