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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 Oct 02. 2022

연휴, 행복해질 기회일지 몰라

결혼 방학 #10

무엇이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에 따르는 선택이,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안경을 써 보면, 분명 기존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고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추석 연휴를 맞아 그가 속초로 놀러 왔다. 사실 연휴 마지막에 엄마 생일 겸 가족 모임이 수원에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어쨌든 내가 곧 이동해야 할 일정이었던지라 그는 머뭇거렸지만, 여름이 완전히 가버리기 전 우리가 함께 즐겨야 할 것 있다며 그를 설득했다. 나는 그에게 하고 싶었던 바닷가 앞 텐트 치고 물놀이, 중앙시장 회 포장, 청초호 요트 투어 등의 속초 여행에 대한 계획을 열심히 설명했고, 그가 오자마자 그것들을 하나씩 실행하느라 바빴다. 속초에 온 지 두 달반 만에 속초 관광객 모드로 연휴를 보냈다. 물론 이 관광객 놀이가 흥겨웠던 건 이곳에 살면서 눈여겨봐 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퍼들이 많은 후진항 앞에 텐트를 쳤다. 며칠 전 태풍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이 좋고, 파도가 잔잔했다. 바다에는 수많은 서린이들이 아주 드물게 오는 파도를 기다리며 보드 위에 올라설 기회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약간 거리를 두고 혼자 튜브에 올랐다. 파란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두둥실 잔잔한 파도에서 서린이의 서핑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두 가족이 아이와 함께 내가 노는 곳 근처로 와 튜브놀이를 시도했다. 한 엄마가 일곱여덟쯤 돼 보이는 핑크색 옷을 입은 공주에게 나를 곁눈질하며 “저 이모처럼 튜브에 앉아 봐!!” 하나도 안 무서워 재미있을걸 이라고 했지만 아이는 결국, 핑크색 튜브 위에 올라타지 못했다. 파도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의 두려움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는 바다에  빠져 짠물을 들이켜는 게 두려워 보드 위에 올라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멋지게 파도를 타는 것, 시도의 끝이 대부분 파도에 삼켜지는 것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다. 나는 그들과 다른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보드에 올라갈 용기, 나는 이렇게 모두가 보드에 올라서는 곳에서 혼자 튜브를 탈 용기? 아이에게 튜브에 올라타지 않아도 나름대로 바다를 즐기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아이가 그 쉬운 튜브 타기에 실패한 게 못내 실망스러웠는지 아이에게 튜브를 타지 않을 거면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바다와 하늘이 이렇게 그저 보는 것만으로 넘치게 아름다웠는데..


나름 아주 바쁘고 부지런한 사흘을 보냈다. 바다를 즐겼고, 맛을 즐겼고, 수다와 데이트를 즐겼다. 혼자서는 못한  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루   개씩 했고 오래간만에 만난 그는 나의 계획에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마치 연애할 때처럼 네가 원하면 이런  귀찮은 것도 아니라는 초심의 자세가 그와 함께 하는 듯했다. 이게 바로 연애할   기분 같은데? 내가 다시 남편이 아니라 애인을 가지게  걸까?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방학새 생긴  사이의 공간이  선물 같달까.   


연휴 마지막 날, 우리는 수원으로 이동해 동생 내외, 엄마, 아빠 그리고 엄마 아빠의 미얀마 양딸(우리 집 둘째가 된 내 여동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생일 파티를 하고, 수다를 떨었다. 내일이 엄마 생일이었는데, 어제가 새로 생긴 엄마 딸 수미의 생일이었다고 해서 둘의 생일 파티를 함께 했다. 지난 1년 가까이 엄마와 통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이야기가 수미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녀를 만난 건 처음이었는데, 가족이 늘어난 것이 퍽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한국에서 일하다가 문제가 생겨 소송까지 진행하게 된 그녀를 돕기 시작하면서 생긴 관계였지만 그녀가 있어 엄마, 아빠가 본연의 어린양을 돌보는 삶이 안정감 있게 유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수미는 엄마, 아빠에게 고맙겠지만 다 컸다며 집 나간 양인 나는 길 잃고 헤매다 우리 부모님의 안전가옥에서 쉬어가게 된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그녀를 챙기고, 그녀가 엄마, 아빠에게 감사하는 그 마음 따뜻하게 느껴져 나도 잠시 더 좋은 사람이고자 했다. 늦은 오후 수원에서 출발해 파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산 아버님 댁에 들렸다. 수원 집에서 싸온 찬을 나누고, 함께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오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연휴는 나흘이었지만 사흘 동안 그와 둘이 놀다 하루 만에 온 가족을 다 본 셈이다. 나에게는 퍽 만족스러운 비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여유로운 연휴 일정으로 인해 다음날부터 1박 2일간 서울에서 이어진 엄마가 생일 선물로 요청한 엄마-딸의 여행 일정도 퍽 안정감 있게 진행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단둘이 박물관에 가고, 외식을 하고, 서촌의 한옥집에서 족욕을 하며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셨다. 엄마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뿌듯하고 행복했다. 내가 엄마의 좋은 애인이 된 기분이랄까? 사십 년을 아빠와 산 엄마는 여행하면서도 맛있는 걸 먹는 것보다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낼 것을 주장하는 아빠가 답답하고 함께 여행할 맛이 안 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빠가 건강해 감사하고, 아빠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를 빼고 우리끼리 여행하니 이런 맛있는 피자를 사 먹을 수 있어 신난단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게 좋았다. 엄마에게 한없이 자애로울 수 있는 근래의 내 심리적 상태가 감사했다. 엄마 말마따나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해도 늘 챙기고 함께하는 아빠도 있고, 든든한 아들도 있고, 친구 같은 딸도 있어 정말 다행이다. 나에게는 철학자 아빠, 행동가 엄마, 친구 같은 동생 내외와 삶의 든든한 파트너인 그가 있어 다행이다. 가족들이 서로 또 각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행복의 가장 큰 요소인 듯 하다.


홀로 지내던 삶 중 만난 가족과 함께하는 연휴는 행복해질, 행복을 나눌 단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좋아하는 영화 <Into the wild>에서 크리스가 매직버스에서 남긴 "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 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가 Supertramp가 되어 오랜 시간 길 위에서 방황하다 깨달은 것을 나는 그 영화를 본 덕에, 이렇게 속초에서 혼자 살다 잠시 가족은 만난 것 만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운좋은 여정인가. 다른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그 영화를 보고 체험없이도 행복의 비밀을 깨치는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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