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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새 안경

불교적 세계관1 _ 연기, 중도, 공

by 방자 Mar 24. 2025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지켜주신다고 믿었다. 섬 마을의 할머니들은 목사 딸인 나에게 초코파이와 강냉이 등을 챙겨주셨고, 그 따스함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어른들, 또래 아이들 중에는 나의 부족함을 아버지의 흠으로, 나아가 교회의 흠으로 여기는 시선도 있었고, 그건 어린 나를 종종 위축되게 했다.


원래 의문이 많은 아이였던 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못했다. 그래도 교훈이 담긴 흥미로운 옛이야기처럼 여길 수는 있었다. 다만 신의 존재나 기적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도시 교회에서 마주한 복잡한 현실과 인간사였다. 사실 나는 비효율적이거나 불합리함을 강요하는 제도들을 전반적으로 힘들어했다. 열일곱에 학교를 그만뒀고, 스무 살부터는 여행을 핑계 삼아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여러 번 옮기며 썼던 사회교육의 안경은 쉽게 벗을 수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쓴 종교적 안경은 벗는 데 시간이 걸렸다. 대략 십수 년쯤? 나는 여전히 목사의 딸이다. 아버지는 은퇴하셨고, 나는 교회에 가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내 깊은 곳에는 여전히 기독교적 세계관이 일부 자리하고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불교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온라인 불교대학에서 경전을 접했는데, 불교의 세계관은 꽤 와닿았다. 합리적이고 명료해서, 나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불교를 나의 종교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다만 몇 해 째 그 곁을 맴돌며, 내가 쓰고 있는 안경 — 즉 관점과 세계관 —을 조금씩 바꾸는 중이다. 나는 불자가 되지 않더라도, 삶에 도움이 되는 그 안경을 쓰고 살아보기로 했다. 나를 이해하는 새로운방법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으로 말이다.


오늘은 그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내 이해엔 부족함도 있을 수 있다. 따뜻한 시선으로, 편하게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불교적 세계관

세 개의 키워드 : 연기법(緣起法), 중도(中道), 공(空)



1. 연기법 – 세상의 본질을 보는 방식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원인과 조건(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기).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고 무상(無常)하다.   

나 역시 고정된 자아가 아닌, 관계 속에서 형성된 존재

존재란 고정된 본질이 아닌, 흐름과 과정

세상은 고립된 개체의 모음이 아니라, 연결된 그물망

철학적으로는 세상을 실체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보는 관점이며,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이라는 불교 세계관의 핵심으로 이어진다.


2. 중도 – 그 이치를 실천하는 방식


두 극단, 예컨대 쾌락과 고행,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를 벗어나 균형을 찾는 길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연기적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살아가는 실천적 지혜   

고정된 신념과 감정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

그 구체적 실천 지침이 팔정도임

유연함과 균형감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길


3. 공 – 연기법에서 도출된 통찰


공(空)고정된 실체 없음(無自性)을 뜻하지만, 완전한 무(無)가 아니라, 조건과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연기 즉 공(緣起卽空)”
 모든 것은 조건으로 이루어졌기에 고정된 본질이 없고, 그래서 공하다.

나 역시 부모, 문화, 경험, 사고 등 조건의 산물

 → 그렇기에 나 자신도 공, 집착할 실체가 없다.



실생활에 적용해 보자!

어느 날, 남편이 싱크대에 물이 한가득이라며 잔소리를 한다. 밥도 하고 설거지도 내가 했는데, 기가 막히고 서운하다. 하지만 연기법의 관점으로 보면, 남편의 말도, 내 감정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과 조건의 결과일 뿐이다. 남편은 아마 오늘 피곤했을 거고, 물 자체보단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 불편했을 수 있다. 나는 피로와 서운함,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겹쳐져서 그 말에 더 크게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공의 통찰을 적용하면, 이 생각과 감정들도 고정된 실체 없이 변화 가능한 것들이다. 지금 이 감정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며 흐름이다. 이럴 땐 화를 내기보다, 집착 없이 균형 잡힌 중도의 마음으로 대응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해본다면 어떨까? “나도 오늘 좀 지쳤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했는데, 물 얘기 들으니까 좀 서운했어. 다음엔 같이 정리해 줄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뭐라고 했을까? 어쩌면 우리 사이엔 불편함 대신, 조금 더 여유롭고 따뜻한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이 불교적 세계관이라는 안경, 꽤 유용하다. 사실 지난 몇 년간 훈련해 온 코칭, 비폭력 대화의 기법과도 맞닿아 있고, 대학원 시절부터 내 것이라 확신했던 구성주의적 관점과도 궤를 같이 한다. ‘종교’라는 꼬리표 때문에 쉽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지만, 이번 기회에 글로 전해본다. 혹시 당신이 요즘 새 안경, 새로운 시선을 찾고 있다면 한 번쯤 써볼 만한 안경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 속 과정이고, 그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은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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